[칼럼]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21)

누가 말하는가, <체르노빌의 봄>을 읽고
뉴스일자: 2015년04월07일 10시25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낳은 소문과 진실을 왜곡한 언론이 생산한 인상은 특정 지역에 사는 주민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를 갖게 한다. 개인적 경험으론 광주가 그랬다. 만화책 <체르노빌의 봄>의 작가 역시 오랫동안 회자하였던 ‘체르노빌’의 이미지에 포획된 채 22년이 지난 그곳을 찾는다.

▲엠마뉴엘 르파주 지음, 길찾기 출판. 출처: 길찾기

 
이 책은 천연색 인쇄지만 전체적인 색조는 흑백에 가깝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공산주의 국가 소비에트 공화국이 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사고 전후의 상황이 앞부분에 소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의 언론 통제와 서유럽 국가 중 최다 원전 보유국 프랑스 정부의 대응도 함께 보여준다. 프랑스 정부는 공산국가 소련의 낙후한 원전과 달리 자국 원전의 우수성과 안전을 자랑한다. 그에 반해 저자를 비롯한 프랑스 국민은 체르노빌 이후 속속들이 밝혀지는 사실에서 고조되는 공포를 느낀다.
 
가장 현대적인 공산주의 도시로 설계되었던 체르노빌 인근 도시 프리피야트는 ‘방사능 저장소’가 되었고, ‘폐허’라는 단어의 의미를 말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변했다. 저자는 예술가란 직업을 ‘창문을 넘어 세상을 보는 일을 하는’ 즉, 세상의 ‘건너편’을 보는 존재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예술가가 ‘체르노빌’을 기록하는 행위는 철학자, 과학자, 인문학자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방사능 측정기가 ‘틱!틱’ 거리는 소리에 긴장을 느끼고, 그것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공간에서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로 몸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고뇌한다. ‘그림을 통해 재앙과 직면하기 위해’ 왔지만 ‘위험을 느끼면서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고,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왔지만 실제로는 피폭의 두려움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떨었다.
 
그런 그의 그림에 어느새 색깔이 입혀진다. 무채색 그림에 유채색 빛깔이 입혀지는 것을 깨닫고 그는 놀란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기에 왔는가, 이 같은 그림이 자신이 그곳에 온 이유가 될 수 있느냐고 자문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체르노빌’의 이미지는 폐허의 무채색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 색이 생긴 까닭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던 그곳에 생명이 움트고, 도로가 숲이 되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비록 불안을 안은 상태지만 삶을 지속하고, 아이들의 웃음이 자라기 때문이다. 사고 이후 그곳에는 무채색의 계절 ‘겨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본 그곳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소련 정부에 의해 사고가 축소되고 프랑스 정부에 의해 원전의 안전 신화가 창조되는 곳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생산된다. 겨울 아니면 봄만 존재하는 그런 이미지 말이다. 저자는 사고 이후 체르노빌에 대한 이미지와 그가 가진 이미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저것이 틀렸으니 이것이 맞다는 주장이 아니다.

앞에서 저자는 ‘건너편’을 보는 존재로서 예술가를 정의했다. 22여 년 전 세상의 창문이 보여준 ‘체르노빌’과 22년 후 저자가 직접 본 ‘체르노빌’은 마치 80년대 초반 언론과 교과서에서 배운 광주와 90년대 내 눈으로 확인한 광주 같았다. ‘누가’ 그곳을 말하는 가에는 힘의 의지가 담겼다. 또,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같은 사건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만화책 <체르노빌의 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립적 힘의 의지로서 국가(정부) 그리고 진실의 담지자라고 배웠던 언론이 ‘사실’을 말하고 해석하는 사건이 어떻게 특정 이미지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체르노빌의 숲도 여느 숲처럼 푸르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에 의의로 복병처럼 방사능측정기가 ‘틱틱’ 요란하게 울리며 위험을 알린다. 그 숲을 거니는 모자(母子)는 방제복을 입고 있다.

특정한 이미지가 넘치는 시대에‘건너편’을 보는 민감한 시선은 예술가만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예민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