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62)

누가 1:26-38 "처녀 마리아였다"
뉴스일자: 2014년12월24일 07시35분

내일모레면 성탄절이다. 기독교회는 예수의 다시오심을 학수고대한다. 그래서 성탄절 전에 대림절을 기념한다. 지난주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었다. 교회전례에 따라 네 개의 초가 다 밝혀지면 성탄절이 가까이 온 것이다.

기독교회는 왜 예수의 다시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가? 온통 세상을 덮은 어둠의 소식 때문이다. 권력과 자본의 폭력과 만행은 도를 넘었다. 민중들은 숨쉬기조차 버겁다. 비탄과 절망, 분노가 우리를 덮는다. 예수 때도 그랬다. 그래서 예수 시대 민중들은 속히 메시아가 와서 이 어둠의 세상을 한 방에 평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독교회의 메시아는 흰 말을 타고 무력을 휘두르는 영웅의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 전적으로 타자의 보호가 필요한 아기의 모습으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 예수오심을 복음이라고 고백한다. 어째서 예수오심이 기쁜 소식인가? 이제 그 이야기를 하겠다.

▲시모네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년, 목판에 템페라, 우피치 미술관

오늘 성경말씀은 마리아의 수태고지이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압축하면,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천사의 입장에서, 마리아의 입장에서 각각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천사의 등장을 어떻게 보는가? 누가 1장 26절을 보니,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처녀 마리아에게 가게 하셨다." 여섯 달이 되었다는 것은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난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서에 등장한다. 다니엘이 본 종말환상을 해석해 주는 천사가 가브리엘이다. 즉 사람을 돕는 존재이다. 가브리엘의 인상을 설명하기를, '사람모습을 한 것 같은 이'(다니엘 8: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다가 매우 힘든 일을 겪어서 어쩔 줄 모를 때에, 정말 고마운 사람을 만나거나, 도움을 입으면 천사가 다녀갔다고 고백해도 무방하다.

이 가브리엘이 먼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인데,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눅 1:19) 천사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이다. 민중에게 해방을 알려주는 전달자는 대개 천사이고, 궁지에 몰린 민중을 극적으로 돌봐주는 자도 천사이다. 구주 예수 탄생소식을 제일 먼저 목자들에게 전하여 준 자도 주님의 천사이다.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천사가 전해주는 소식의 내용을 보자.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눅 1:31)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이름을 미리 정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아기이다. 날 때부터 하나님이 점찍은 아기이니 복되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 난 아이의 경우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마리아는 전혀 예기치 못한 소식을 접했다. 이 소식은 마리아에게 죽음 같은 소식이다. 왜 죽음 같은 소식인가?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남자와 정혼(결혼과 매일반)한 처녀이다. 이스라엘 혼인관습은 결혼한 다음에도 잠자리를 갖지 않고, 1년 남짓 친정에 눌러산다. 일 년쯤 지나고 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가서 비로소 잠자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지금 마리아는 아직 신방을 치르기 전이다. 게다가 잉태하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불분명하다. 천사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한 말과 비교하면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누가 1:13)

천사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요셉의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이 없다. 아비를 모르는 아이의 잉태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 말을 전하는 천사도, 듣는 마리아도, 이 말씀을 보는 우리도 너무나 잘 안다. 그런데 천사는 마리아의 그런 내적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하지 않고, 가장 복된 말, 최상의 천상언어를 마리아에게 전한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28절)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32-33절)"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에게 재앙일 것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도 천사가 최상의 복된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세상에는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실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진실로 다른 관점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득권 세상에서 평등세상을 구하려는 민중의 관점이기도 하다. 참사람이 되고, 참 진리를 구하고 참 세상을 구하려 한다면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속에 물들어서 주류(교회)가 유포시킨 가치관으로 진리를 재단하고, 신앙척도로 삼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살아가면, 어떻게 되나? 지배세력만 좋아한다. 민중세상은 오지 않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냥 흘러간다. 당연히 우리는 이 시대를 덮은 어둠을 극복하기 힘들다. 천사가 말한 실제가 우리 세상이 되도록 다른 관점으로 세상보기를 하자.

▲할매들은 자식잃은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받고, 유가족들은 할매들이 그 긴 세월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모습에 용기를 얻었다

이제 마리아의 입장을 보겠다. 오늘날 개신교가 마리아를 예수의 모친으로만 단순히 기억하는 것에 비하여 가톨릭이 마리아를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섬기고, 미사전례에서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할 만하다는 평가가 이 말씀에 나온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요한을 낳을 것을 말할 때,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부정적 말만 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1:18)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은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너는 말을 못하게 될 것"(1:20)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에 대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34절) 이 말에 천사가 말한다.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1:36)

엘리사벳이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면, 마리아는 '임신해서는 안 되는 여자'이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남세스러워서 그렇지 아이를 낳아도 아무 하자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남자를 알기 전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은 온갖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일이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들은 후에, 순순히 받아들인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자신에게 어떤 혹독한 시련이 닥칠지 충분히 자각하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는 마리아의 모습이 훌륭하다. 마리아는 가장 낮은 사람 중 한 사람인 것을 기억하라. 고대사회에서 14살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사회적 권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 의식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뜻을 이루는 민중의 자격이 있다. 자기를 바쳐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의 이성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리아는 해방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민중공동체의 또 다른 표상이다. 마리아가 요셉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수태한 사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가리킨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분은 전혀 새로운 모양으로 역사 속에서 생겨날 것이다.(『해설판공동번역 성서』일과 놀이, 119-120쪽)

▲헌법재판소가 저지른 27년만의 만행과 전혀 다른, 희년공부방의 매우 특별한 20년.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고백을 눈여겨보자. "당신의 말씀을 내가 이루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뭘 하겠다고 나대는 태도가 아니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 수용하고 그 안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가 돋보인다. 거룩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었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 수용적 태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았다. 복음이 열린 것이다.

새 세상을 간절히 원하는 만큼, 우리의 전제가 있다. 나의 조건과 처지를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단 한 개도 버릴 용의가 없으면서, 단 한 개도 바꿀 결의가 없으면서 좋은 세상을 바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이 어둠의 세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당신은 어떤 결단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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