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할배는 눈물을 흘리며 세월호 유가족을 안았다

밀양·청도 할매할배들의 72시간 송년회 동행기 (2)
뉴스일자: 2014년12월20일 20시11분

40일 넘게 단식하다 쓰러진 코오롱 최일배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굴뚝에 오른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72시간 송년회 2일째, 새벽부터 분주히 준비한 할매 할배는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과천 코오롱, 평택 쌍용자동차를, 한 팀은 청주의 공무원 연금 개악 반대 농성천막, 충북 유성기업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청도 삼평리 할매들을 따라 과천으로 향했지만, 40일이 넘는 단식으로 쓰러져 후송된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장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할매 할배는 단식농성장에서 정상천 노동당 당원에게 최일배 위원장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바람이 거세 강원도 홍천에서보다도 체감온도는 더 낮은 듯 했고, 그래서인지 할매 할배도 연신 옷매무새를 다잡았습니다. 바람에 쓸려 단식농성장 텐트도 ‘끼익-끼익’하는 소리를 냈고, 입구의 풍경도 쓸쓸한 소리로 울렸습니다.   

최일배 위원장과 동갑이라는 이은주(47, 청도 삼평리) 씨. 최일배 위원장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투쟁은 계속 해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 어떤 말도 쉽진 않겠지요.

이은주 씨는 “단식을 시작하자 아무 대답 없던 사측이 대화의 제스쳐를 취한다고 들었어요. 단식 얼마나 힘들겠어요. 안 해본 사람이 이런 말 하는 것도 죄스럽지만, 그래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계속 해야겠지요. 밀양과 청도도 싸우다보니 희망이 보여서 계속 싸우는 것이거든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오후에는 평택 쌍용차에 도착했습니다. 김정운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수석부지부장의 안내를 받아 굴뚝이 보이는 공장 한켠에 도착했습니다. 담벼락을 넘어 보이는 70m 높이의 굴뚝. 굴뚝 위에는 마땅한 텐트도 하나 없이 해고자 2명이 농성 중이었습니다. 굴뚝에서 나오는 증기가 안개처럼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할매 할배들은 도착하자마자 인근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들에게 호통을 시작했고, 경찰들은 스타케미칼에서처럼 모습을 감췄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잦아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할매 할배 외에도 10여 명의 사람들이 더 있습니다. 담벼락을 따라 드럼통 3개가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장작에 불을 지펴 드럼통에 놓고는 고공농성 중인 이들과 함께 추위를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할매 할배는 추위에 떨면서도 몸 녹일 생각은 않고 굴뚝만 바라봅니다. 갈 수만 있다면 꼭 가서 안아주고 싶은 심정인가 봅니다. 전화기를 통해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말 합니다. “할머니들, 고맙습니다. 지난 11월 13일 대법원에서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선고가 났습니다. 그때 결과를 들을 때도 할머니들은 법원 앞에서 같이 울어주셨지요...아픈 사람들이 함께 보듬으며 살아가는 게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입니다. 힘들고 피곤해도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디다.”

할매 할배도 화답합니다. “우리 할매 할배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경찰을 쫓는 한옥순 할매
▲안아주지는 못하고 할매들은 김정운,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게 하트표를 날린다

세상에 혼자라고 느껴질 때
먼저 간 아이를 안아줄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
할매 할배는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다

72시간 송년회가 막바지로 달려가며 도착한 곳은 세월호 안산 분향소 입니다. 참사 후 245일(16일 당시)째인 분향소는 스산했습니다. 정문 우측으로는 컨테이너박스 10개를 이어붙인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황실이 있습니다. 할매 할배들은 투쟁현장을 돌며 투쟁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는 공분하다가도 세월호 안산 분향소에서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상황실 앞으로 마중 나온 ‘(단원고) 2학년 2반 김소정 엄마’ 김정희(44) 씨를 보자마자, 눈물 많은 이억조 할매가 웁니다. 감 따다가 감에 맞아 얼굴에 몽고반점 같은 멍이든 억조 할매, 그 멍 위로 눈물이 흐릅니다. 검게 탄 김정희 씨의 얼굴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김정희 씨와 유가족 몇몇이 눈물을 추스르며 할매 할배를 상황실로 안내했고, 할매 할배는 잠깐 몸을 녹인 다음 분향소로 나섰습니다. 분향소로 향하는 길, “오는 사람마다 그카면 좋겠나”라며 억조 할매를 나무라는 이은주(47, 청도 삼평리) 씨. 그런데 은주 씨의 눈도 일렁입니다.  

▲김정희(왼쪽) 씨와 이억조 할매

분향소에는 287개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앳된 얼굴들이라 졸업 앨범을 펼쳐놓은 것 같지만, 영정사진입니다. 영전사진 아래로 다소 시든 국화가 놓여있고, 간간이 희생자들이 생전에 좋아했을 사과주스 등 먹을 것과 꽃다발, 편지도 놓여있습니다. 편지들에는 하나같이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합니다. 수취인의 주소는 없습니다.

올 4월, 송전탑 공사 재개를 앞두고 노심초사하던 밀양과 청도 할매 할배들은 유달리 안방 TV로 세월호 참사를 챙겨봤었습니다. 할매 할배들의 손자뻘 이어서였을까요? 버림받은 자들의 연민 때문이었을까요? 할매 할배들은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듯, 입구에 놓인 서명용지에 열심히 서명했습니다. 글을 못 쓰는 박순쾌(77, 청도 삼평리) 할매는 진행요원에게 서명을 부탁했습니다. 박순쾌 할매는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노···부모들은 우야란 말이고”라고 하며 나더러 부조는 어떻게 하는지 묻기도 했어요. 아직 세월호 참사는 상중(喪中)인가 봅니다.

분향, 혹은 문상을 마친 할매 할배들은 유가족과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식뻘인 유가족(부모)들을 꼬옥 안습니다. 안겨있는 유가족들, 눈물을 거두지 못합니다. 먼저 떠나간 자식들을 단 한 번만이라도 꼭 안아볼 수 있다면, 단 한 번만 손잡을 수 있다면···하지만 하릴없이 눈감고 할매 할배의 등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할매 할배들에게 직접 만든 세월호 목걸이를 걸어 줍니다. 추호남 할매는 목걸이를 꼭 감싸 쥡니다.

유독 눈물이 많은 김정희 씨는 취재 중이던 저에게도 목걸이를 걸어 줍니다.

“할매들이 안아주시니 친정 엄마가 안아주는 것 같아요. 할매들 우리한테 별 말은 안 해도 품에 안기니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뉴스에서 할매들 소식은 많이 들었는데, 할매들 싸우는 것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어요. (밀양 행정대집행 당시) 할매들이 끌려 나가는 걸 볼때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더니···그때 제가 옆에 있을 수 있었으면 같이 나서서 싸우고 싶은 심정 이었어요···이제는 정부를 향한 아프고 억울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할매들도 우리도 죽을 때까지 이 분을 풀지 못하면 정말 억울할 거예요.”(김정희 씨)

고독과 고난 속에서도 ‘너’는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이후 할매 할배는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고 전광판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케이블방송업체 씨앤앰(C&M) 하청업체 해고자 강성덕 씨와 임정균 씨를 응원했습니다. 이날 일정이 끝나고 할매 할배들이 잠든 시간, 간단히 맥주를 마시던 자리에서 함께 있던 지인이 72시간 송년회의 소회를 말합니다. 연대를 하러 왔다지만, 어차피 싸워야하는 사람들은 버스가 돌아가면 다시 혼자 남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애가 타더라도, 할매 할배가 고공농성장에 함께 오르진 못하니까요. 할매 할배는 다시 밀양과 청도에서 저마다의 과업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안산 분향소에서 세월호 유가족 김정희 씨와 억조 할매가 포옹하던 순간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김정희 씨의 표정과 할매를 끌어안은 그 손의 떨림. 그 떨림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습니다. 포옹은, 빼앗긴 자들이 역시 모든 걸 빼앗기고 한파에 내몰린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요? 할매 할배가 살기 위해 품앗이를 해 왔던 것처럼, 사람의 온기도 이어져야만 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더 이상 저 굴뚝 위에, 천막에, ‘광야’에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바라보는 이 없다면 어떨까요.

스타케미칼 방문 당시, 밀양 주민 김영자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농사를 지어서 이제 조금 살기는 사는데, 35년 전에는 우리 의식주 해결도 안 됐어요. 지금은 하우스 치고 살만해졌어요. 이웃사람들도 내 집에 와서 일도 같이 한 덕분이죠. 내가 보니 공장도 마찬가지예요. 공장에 와서 일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공장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 한 분 한 분이 소중한 걸 알아야합니다. 나는 내 집에서 같이 일 해준 분들, 그분들 덕분에 내 삶이 나아진 거를 알고 있으니 그 마음을 이어 받아서 나도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줄 겁니다. 시간 나는 대로 함께 일하고 함께 도와주며 살아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공장 주인인 자본가도 그렇고, 국민 통치하는 국가도 생각 자체가 틀렸어요. 왜 일하는 사람들이 굴뚝에서, 움막에서 살아가야하나요. 송전탑과 싸우다가 여기까지 오다보니 꿈이 하나 더 생겼어요.”

이어지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급히 다른 곳 사진을 찍느라 듣지 못했습니다. 그 꿈은 무엇일까요? 김영자 씨의, 그리고 밀양과 청도의 할매 할배가 천막에, 굴뚝에, 광야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한 그 한 번의 포옹이 사무치게 따뜻했을 것이란 짐작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광화문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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