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뉴스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노동자의 삶과 노동, 투쟁을 연재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힘을 모아낸 여성노동자, 노동조합은커녕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려운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2주에 한 번씩 십여 차례 연재하고자 합니다. 제보와 문의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뉴스민 (070-8830-8187, newsmin@newsmin.co.kr)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12월의 오전 9시, 시장은 한산하다. 등교하는 학생이 드물게 시장을 지나고, 상인들은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다. 아침잠이 없는 동네 어르신들이 일찍부터 시장을 기웃거린다.
대구시 달서구의 한 재래시장, 오가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다. 7년째 시장에서 유제품을 팔고 있는 김혜수(가명, 50대) 씨다. 혜수 씨는 500원짜리 설탕 커피로 추위를 달래며 하루 영업을 시작한다.
매대를 펴자마자 이가 없어서 밥을 못 먹는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죽, 홍시, 요거트로 요기를 때운다. 할머니는 올 때마다 요거트만 만 원치 산다.
혜수 씨는 “할머니는 이가 하나도 없으셔서 맨날 요플레만 사가신다. 요플레 떨어지면 또 오시고. 어떤 날은 내가 안 나오는 날도 요플레 없다고 나오시는데, 일부러 쉬기 전날은 많이 챙겨드린다. 되게 추운 날은 또 나오기 번거로우니까 많이 챙겨드린다”며 “오늘 할머니 기운이 없으시네. 마음이 안 좋다”고 할머니를 걱정했다.
시장에 오는 손님들은 대게 10개씩 한 번에 사간다. 혜수 씨는 제품 포장하는 시간도 덜고, 차가운 음료를 덜 만지기 위해 미리 10개씩 봉지에 담아 온다. 차가운 음료를 계속 만지다 보면 손이 금방 하얗게 튼다. 그래서 늘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다.
그는 “시장에서 일하면 장사하는 재미는 있다. 손님들이 한 번에 10개씩 사가니깐 장사가 잘 되는 편이다”며 “매일 일 마치고, 사무실가서 내일 팔 제품을 10개씩 봉지에 담아놓고 퇴근한다. 그러고 집에 가면 밤 9시다”고 말했다.
혜수 씨는 매일 9시 30분에 시장에 나와 저녁 6시 30분까지 자리를 지킨다. 여름에는 조금 더 오래 일하기도 한다. 출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아침 손님을 맞고, 11시 30분이 되면 본인 구역 배달을 시작한다.
그는 “우리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 내 구역에 맞춰서 자기가 알아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주택에 배달하는 사람들은 배달만 하고 나면 끝인데, 나는 시장이니까 손님이 없어도 6시 반까지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게 손님과의 약속이다”고 말했다.
시장 일대가 혜수 씨의 배달 구역이다. 유제품 상자를 담은 전동카트를 끌고 시장 골목골목을 다닌다. 전동카트에 담긴 제품 종류만 24가지, 요플레나 우유는 맛도 제각각이니 종류는 24가지가 훨씬 넘는다. 배달을 다니면서 시장 상인들에게 안부도 묻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기도 한다.
혜수 씨는 “손님들이 달라고 안 해도 이제는 내 손이 먼저 간다. 고객들이 매일 뭘 사 먹는지 알기 때문에. 돈도 바로 주는 사람도 있고, 일주일 치를 월요일에 계산하는 사람, 토요일에 계산하는 사람 다 다르다”며 “하다 보면 다 외워진다. 안 헷갈린다”고 말했다.
주 고객이 시장 상인이다 보니 돈에 이것저것 딸려오는 경우도 많다. 그는 “콩나물 아줌마한테 팔면 콩나물 대가리 묻은 돈 받고, 마늘 아줌마한테 팔면 마늘 찌꺼기 묻은 돈 받고 그런다”며 웃음을 지었다.
배달을 끝내고 다시 자리에 돌아오면 어느덧 오후 1시를 훌쩍 넘긴다. 혜수 씨는 시장 상인들과 함께 늦은 점심을 챙겨 먹는다. 오후에는 자리를 지키며 손님을 맞는다. 내복도 입고, 회사에서 주는 패딩, 조끼, 티셔츠까지 껴입었지만 바람이 너무 차다. 시장 안은 햇볕도 들지 않는다.
혜수 씨 매출의 90%는 시장을 다니는 유동 손님이다. 겨울철에는 차가운 유제품을 찾는 손님이 줄어든다. 손님이 없으면 그만큼 급여도 줄어든다. 겨울과 여름 급여가 2~30만 원 차이 난다.
그는 “우리는 기본급 없이 우리가 파는 만큼 가져간다. 하루에 팔아야 할 물량이 정해져 있지는 않은데, 우리 아줌마들은 무조건 많이 팔아서 많이 벌라고 하지. 오늘 번 돈은 내일 아침에 은행 배달 갈 때 바로바로 입금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다 개인사업으로 돼 있다. 4대 보험은 없지만, 눈 많이 올 때 다치거나 일하다가 다치면 회사에서 다 해준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도 해 준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작업복과 전동수레도 제공한다. 혜수 씨는 “겨울에는 이 유니폼, 패딩, 조끼, 티셔츠, 바지, 모자, 목수건 까지 회사에서 다 준다. 옷도 다 주니깐 특별히 드는 돈이 없어 좋다”고 말했다.
혜수 씨는 7년 전, 친구 소개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집에서 부업으로 재봉을 했다. 아이 3명을 키우기 위해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거 하면서 애들 다 키웠지. 고등학교, 대학교 다 보내고, 하나는 대학 졸업도 시켰으니까. 맞벌이 안 하면 자식 셋 못 키운다. 내가 벌어서 생활비 하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며 “빨리 배달 돌리고 볼일 보고 올 수도 있고, 내 배달 고객들 약속만 맞추면 되니깐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가정주부가 살림하면서 돈 벌기가 쉽지 않잖아. 살림 살면서 일하기 수월한 직업이다”고 말했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유제품 판매원은 생계비도 벌어야 하지만 집안일도 해야 하는 주부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70년대부터 생겨난 방문 유제품 판매원은 대표적인 주부직업이 되었다.
정부는 여성의 일·가정양립을 위해 유제품 판매나 마트 캐셔 같은 시간제 일자리를 추천한다. 기본급도 없고, 4대 보험도 안 되는 불안한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여성 경제활동인구가 50%를 넘었지만, 여전히 가정은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책임감 부여에 오히려 불안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처럼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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