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제안] (6) 모든 것이기에 그 무엇도 아닌? 인권을 묻다.

인권이 모든 것이 될수록, 그 무엇도 아닌 게 되어버린 시대
뉴스일자: 2014년12월11일 13시35분

[편집자 주]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와 <뉴스민>이 함께 하는 [인권제안]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 세계인권선언’ 66주년 기념으로 다양한 인권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12월 한 달 동안 총 13편이 연재 될 예정입니다. “인권의 바람이 통하도록 마음의 창을 열어주세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전쟁과 대공황, 혁명의 역사 뒤에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올해로 66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선언의 대전제가 이처럼 무력했던 적이 있을까.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삼평리의 주민들에게, 광화문역 지하로 내려간 장애인들과 공장 굴뚝으로 올라간 노동자들에게, 시내 거리에서 쫓겨나는 성소수자들과 사이버 공간에서조차 벌거벗겨지는 국민들에게, 굶어 죽은 어느 예술가와 이름 모를 윤 일병들에게, 선언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또 저들에게 인권은 무엇일까. 여성대통령을 비하하고 모독하는 것에 왜 여성단체들이 나서지 않느냐 준동하고, 북한 인민의 인권문제에는 왜 침묵하느냐며 인권운동가들을 다그치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폭력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책동하는 저들에게, 감시와 사찰의 이유를 국민의 안전과 안정에서 찾고, 검열의 목적을 오히려 사생활권 보호로 환치시키고, 기초생활수급의 권리를 국가와의 채무관계로 선전하는 저들에게, 인권은 누구의 권리를 말하는 것일까.

  인권에 대한 현재적 물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하여 각종 법규가 인권보장의 내용을 담아 개정되고 있다. 여기저기 지자체에서는 인권조례를 앞다투어 제정하고, 그에 따른 위원회를 설치한다. ‘○○인권선언’이라는 말은 이제 진부하다시피하고, 인권을 주제로 한 페스티벌과 상징물, 공간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보다 이제는 공공기관, 학교, 병원, 복지시설, 심지어 경찰기관 등에서의 인권교육이 더 보편화되었으며, 광주의 한 기초지자체는 인권시범마을을 조성한다고까지 나섰다. 삶의 불안과 정치적 무기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민주국가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 혹은 통치의 합리적 수단이나 근거로 인권이 적극 취급되고 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제도권 내에 인정되고 명목상으로 나마 확대되어 간 과정은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본격화되며 노동법 개악, 구조조정, 한미FTA 체결 등 축적방식이 재편되는 가운데, 실질적인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과정과 함께 있기도 하다. 1997년 IMF로 인한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의 본격화, 자유주의 세력 집권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영리화 정책과 감세정책들, 한미FTA 반대에 대한 대응과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들. 법과 질서의 확립, 안전이라는 명분을 통해 스스로가 지닌 불안정함과 구조적인 위기의 원인을 지적하는 대중들의 저항을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방식은 언제나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인권 대통령’을 가질 수 있었고,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번듯한 기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정작 오늘의 내 삶을 버려야 했고, 내일의 희망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 2008년 자본의 위기와 함께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회귀하고 있다. 국가의 정치는 개인의 사적 이해를 공공적인 것의 아래에 두고 통제․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 이해관계를 ‘무엇이 공공적인 것인가’ 자체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애초에 정치가 자기 이익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면, 위기 속에서 이제 정치는 가장 본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인권 역시 그 가장 본연의 모습, 즉 ‘가진 자들의 권리’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국가의 통치원리로서 인권은 포함되어 가고 있지만, 그 통치의 목적은 인권을 배제하는 것인 셈이다.

  다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마치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인권의 가치는 모두가 보호해야 마땅한 것으로,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 그것의 부정이 아닌 과잉으로 인권이 위기에 처해지고 있는 시대. 인권이 모든 것이 될수록, 그 무엇도 아닌 게 되어버린 시대.

  인권을 —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당연히 갖는 권리’ 등 —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그것의 핵심에는 ‘인간다운 삶’이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권리들이 보장되고 발현될 때에 존엄성은 그 기본조건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누가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삶(의 기준)인가?’에 대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이해는 같을 수 없다. 인권은 이런 사회적 힘의 긴장과 갈등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초월적인 개념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특정한 사회세력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피를 먹고 자란 불온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야만의 사회에서 인권운동가가 ‘좋은 일 하는 사람’으로, ‘인권 전문가’로 불리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이 인권은 현실 앞에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는가. 인권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현장은 더 구체적이고, 선명해져야 한다. 체제를 더욱 안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가용자원으로서 인권이 활용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세계인권선언이라는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나 스스로 되물어보는 불안한 질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기념일을 맞으며 인권의 보편성을 전제가 아닌 지향으로 받아들이며 싸우고 있는 모든 분들의 건강을 간절히 빌어본다.


※이 글은 12월 9일 ‘2014대구경북인권주간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교육공간 와’가 주관한 토론회의 발제내용 중 일부를 발췌,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 및 전체 자료집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자료집 내려받기)
 

인권제안 연재 순서

1) 맞을 만한 사람은 없다. - 12월1일 박윤숙
2) 있으나마나 한 게 어디있나요? - 12월 3일 정지윤, 이희봉
3)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는 인권- 12월 4일 도경화
4)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로열석에 앉아야 하는 이유- 12월 8일 박현경
5)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 세계인권선언- 12월 10일 권혁장
6) 모든 것이기에, 그 무엇도 아닌 인권을 묻다
7) 나에게 너무 어려운 자동응답기
8) 인종문제와 관련된 표현의 문제점
9) 이주민을 위한 한국어 교재, 남녀차별을 가르치다
10) 혐오를 금지하라(가제)
11) 학교를 떠나기가 가장 쉬웠어요
12) 좁혀지지 않는 마음
13) 가톨릭 노숙인 쉼터, 우리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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