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남다른 점은 무엇인가? 믿는 이들이 믿음의 주,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는 초월적 인간이어서인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앞에 다가온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예수도 사람인지라 일신의 편안함이 그립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자고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도 신상에 지장이 오면 딱 거기서 멈춘다. 희생하면서까지 무엇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다. 인생을 걸지는 않는다. 그러니 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자기 인생을 걸고 악에 투신하는 인간들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가는 길이 고난인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맞이했다. 죽을 줄 알면서도 핑계를 대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냥 걸어갔다. 자기 인생 전부를 걸었다.
그런 예수의 속성은 오늘 성경말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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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어린 예수>, 윌리엄 헌트, 1860년 -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왼쪽)과 논쟁하는 어린 예수(오른쪽)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율법학자들은 율법 두루마리를 소중하게 안고 있거나 화가 난 표정,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예수 옆에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다. 성전 안 화려한 인물들과 달리, 성전 밖(오른쪽 끝)에는 굶주림에 지친 이와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이 있다. | | |
오늘 성경말씀은 성전에서 예수가 대표적인 적대자인 대제사장들과 논쟁하는 장면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분위기를 한번 상상해보자. 어떤가? 따뜻하고 우호적인가? 긴장 팽팽인가?
예수가 갈릴리에서 활동할 때와는 완전 다르다. 갈릴리에서도 적대자들과 갈등, 부딪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는 민중들이 깨우치는 보람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스트레스를 풀면서 비교적 재미있게 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호랑이굴이다. 예수가 성전정화사건을 일으켰을 때 한 말씀을 빌자면 '강도들의 소굴'(마태 21:13)이다. 적대자들의 총본산이다. 그러니 호시탐탐 노리는 족속들이 득시글거리는 중에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조리 감시사찰 당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살벌한 분위기이다. 삼평리 현장이 격렬할 때도 그랬다. 할매들과 지킴이들을 채증한 동영상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충분하리라.
게다가 이미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사고를 쳤다. 성전상인들의 상거래를 일시 중단시켰다. 그것은 성전기득권세력들에게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 첫 말씀도 성전세력이 예수께 시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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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공사에 저항하는 주민, 대책위 활동가. 공사장 위쪽에서 경찰이 채증하고 있다. [사진=청도345kv송전탑반대대책위] | |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말하였다" 대제사장이 하는 가장 큰일은 성전체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의 최종권세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 던진 말,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는 말은 매우 심각한 물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다. "당신은 누구 허락받고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최종결재자인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이런 일을 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무허가는 권력이 이래라저래라 하기 좋은 대상이다. 대제사장은 당대 최고권력이다. 예수는 시골무명청년이다. 게다가 장소는 대제사장의 나와바리인 성전이다. 내가 당대 최고권력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 아무래도 수세적이 되기 쉽다. 그런데 예수는 매우 당당하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어디에 기인할까? 틀에 매이지 않아서이다. 어떤 사회든 한 사회가 사회구성원에게 요구하는 암묵적인 질서가 있다. 그것이 도덕윤리로, 이데올로기로, 실정법으로, 또는 각종 규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암묵적 질서라는 게 대부분 지배자에게 유리하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사회기반제도를 이용해서 사람들이 이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암묵적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가? 어려서부터 지배계급의 불의와 거기에 학대당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모순에 대해 일찍 눈이 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배자들의 율법해석에 목매어서 살기보다는 하늘 아버지의 뜻이 원래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탐구했다. 예수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옛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자신이 율법을 독자적으로 집중탐구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거저 되는 것은 없다. 그만한 준비와 몰두, 노력, 투쟁이 있다.
또 하나, 예수는 기존질서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다.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아온 경험이 있기에, 예수는 즉시 세례자 요한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의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이 예수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 예수는 요한의 운동을 잇기 위해서 등장했나 싶을 정도로 요한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첫 일성도 요한과 똑같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라고.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죽자 장사지내고 나서, 그 사실을 곧장 예수께 알렸다.(마태 14:12) 예수는 요한이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다.(마태 11:11) 이처럼 정서적으로 이념적으로 가까운 동지였기에 예수가 요한이야기를 하는 건 자연스럽다.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말했다.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소?"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그러나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는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무리가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다고 답했다. 예수시대 지배자들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요즘 지배세력은 묵묵부답으로 처신한다.
이에 대해 예수도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지 않겠다"고 한 방 먹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예수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한 후에 해설하기를, 아버지 말씀에 순종한 맏아들이 바로 세리와 창녀이고 대제사장은 순종하지 않은 둘째 아들이 돼버렸다. 이들은 직전에 예수에게 한방 먹어서 매우 기분이 상해 있는 터인데, 연타로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두 아들 비유에서 자신들이 세리와 창녀에게 비교당한 것이다. 이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정말 이런 말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기분 상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첨하고 비위 맞춰주는 말만 듣고 산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치욕스런 모욕을 당했다.
상대가 권력자든, 부자든, 힘 있는 자든 간에 사람 간판에 팔리지 않고, 주눅이 들지 않고, 수평적으로 할 말 다하는 예수의 기개가 놀랍다. 이것이 자유로운 영혼이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이다. 예수가 말씀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이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저변에 깔린 종교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다. 세리와 창녀는 율법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다. 율법이 낙인찍은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율법에서 최우선자리에 있다고 자타가 공인한 대제사장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세리와 창녀가 어떤 공덕이 있어서 이런 특혜를 누리는 것인가?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에 말씀을 비추었다. 거기서 드러난 죄와 허물을 뉘우쳤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다. 아주 간단하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 의가 없다. 오직 예수의 말씀에 자신을 맡겼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어떤가?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판단했다. 자기들의 자리, 이익에 도움이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만 따졌다. 과연 이들은 평생 뉘우침, 애통이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해 보았을까? 그들 삶의 자리가 애통의 기회를 아예 원천차단해 버렸다. 결국은 그들 삶의 자리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다고밖에!
삶의 자리가 한 사람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삶의 자리에 있느냐는 죽고 사는 매우 결정적인 문제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그들의 낮고 천한 삶 덕분에 판단과 편견 없이 예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키는 것, 뉘우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만큼 움켜잡을 것 없는, 미련을 남길 삶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배세력은 가진 게 많았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평생 추구한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자리가 너무나 아깝고 컸다. 늘 자기들이 명령하고 남을 정죄하거나 사죄 지시를 내리기만 할 뿐, 스스로 자기 죄를 애태우며 슬퍼한 적이 결코 없다. 차별을 당해야 자기 존재를 돌아보고 슬퍼할 텐데, 차별하기만 했기에, 더더욱 약자의 설움을 모른다.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예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예수는 그저 자기들 성전체제의 훼방꾼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다. 대제사장과 세리창녀의 옮고 그름을 분간하기는 쉽지만, 막상 내 삶을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내 일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영의 감화로 자기를 돌아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하수상한 시절, 악한 권력이 만들어내는 차별과 이간질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함께 애통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자기 의 대신에 하늘 은총에 기대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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