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51)

사도행전 1:6-14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뉴스일자: 2014년06월03일 15시04분

2014년 6월 1일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다. 부활절 성경말씀은 계속해서 예수 죽음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한다.

뉴스민에 『밀양을 살다』 책 서평을 썼다. 그중 결론 대목이다.

"『밀양을 살다』의 주인공들은 비록 송전탑 반대 싸움으로 평범한 일상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세상을 새로 깨우친 것이다. 소박하게 땅만 일구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연 질서 말고도 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응성시러운 또 다른 세상이 바로 자기 코앞에도 있다는 것을 새로 알았다. 이것만 해도 이분들은 모든 고생을 상쇄하는 보람을 얻었다. 이런 세상물리를 모르고 살다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허다한가? 그리고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전국 각지에 자기들과 같이 억울하고 열통 터지는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데 위안을 얻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각성이 솟는다. 약자들이 연대해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음을. 『밀양을 살다』』는 바로 이 평범한 진리를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민중전사들을 통해 풀어낸다. 그리고 우리 가슴을 적신다."

인생에서 어떤 풍파도 겪지 않고 평탄하게 살면 참 좋겠지만, 자신의 의지나 환경과 무관하게 자신과 가족, 사회공동체가 격랑에 휘말리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밀양과 청도 삼평리 주민들이 그 단적인 예다.

공감지수라는 말이 있다. 타인, 이웃의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공감능력의 정도를 말한다. 사회적 대재앙을 보면서, 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그 고통이 결코 남의 일은 아니라는 보편적 정서이다. 비극적인 사건도 개인에게만 내버려두지 않고, 그가 속한 확대가족이, 그 사회가, 그 시대가 함께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대면하면 그 이후 문제해결은 훨씬 원활하다. 그러나 자신은 그 일을 겪지 않아 다행이라며, 사회의 공적문제로 보지 않고 외면하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더욱 악순환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비극사건 악순환의 대표적 사례는 권력이 조작해 낸 공안사건이다. 고문으로 억지간첩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당사자와 가족은 친척들에게 완전히 단절당하고, 동네에서도 빨갱이로 왕따 당하고,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생존해야 하는 권력의 가장 극심한 피해자가 되고 만다.

억지간첩을 만들어 낸 권력을 규탄하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억지간첩이 된 사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세상은 되레 비극의 당사자를 손가락질하는, 너무도 불의하고 모순된 세상을 수십 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억지간첩이 통하는 원인은 분단에 있지만, 분단을 악용하는 공안이 더 나쁜 놈들이다. 

결국, 그런 일을 조장한 권력의 불의에 눈감고, 방치한 결과가 대형참사이다. 대형참사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민중을 덮친다. 대형참사의 원인을 캐고 들어가면, 그 영역의 관피아들, 권력의 하부구조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 낸 비리의 결과물이다.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신문(14.5.28 16면)에 '역사와 책임'이란 글에서 말하기를,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수많은 마피아 집단들은 다 공안권력에서 파생했다고 했다. 결국,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가 대중에게 고스란히 돌아온 것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초기 예수공동체를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덮친 당대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경험을 어떻게 승화시켰는지?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었는지를 보자.

그들을 덮친 공동의 위기는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죽음 경험이다. 사도들은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지배세력이 합세하여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경험했다. 국가폭력이 무죄한 자를 살해하는 공포를 적나라하게 겪었다. 그 와중에 혼자 살겠다고 뿔뿔이 도망친 부끄러운 과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사도들은 여자들의 부활목격증언, 엠마오로 가던 다른 제자들의 증언, 마지막에는 자신들에게도 나타난 예수를 만나면서,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완전하게 깨우친다. 예수는 제자들과 40일 동안 지내고 난 후, 마지막 작별인사를 남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오늘 성경말씀 첫 절에서 사도들이 예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의 영의 오심은 이스라엘을 되살리는 은총의 상징으로 나온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온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사도들의 물음에는 세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①이스라엘이 해방되느냐는 것 ②그때가 지금이냐는 것 ③그 일을 예수가 하시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답은 약간 동문서답이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7-8)라고.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독립에 골몰하지 말고, 성령을 받아서 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답은 나라의 독립을 간절히 고대하는 제자들의 정서와는 달리 좀 생뚱맞다. 어찌하여 예수는 이렇게 답하는가? 민족주의, 애국주의는 남의 일인가? 요즘 말로 한 국가를 뛰어넘어 글로벌시대에 걸맞게 살라는 말인가? 

지금 브라질은 월드컵 때문에 내홍이 심하다. 월드컵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붓는 정부에 격분, 항의하는 시위자들을 유혈진압 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이런 반민중적인 월드컵을 꼭 해야 하는가, 전 세계 사람이 밤잠을 설치며 축구경기를 봐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국가나 민족을 내세우며 애국심을 조장하는 선전 중에는 반민중적이고 심지어 악한 일들도 무수히 많다. 그런 나라가 민중에게 무슨 상관인가?

예수가 사도들에게 내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범주를 넘어서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민중을 학대하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는 승천한다. 승천은 예수의 일생(탄생-죽음-부활-승천-재림)을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이다. 예수 승천기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만 나온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은 매우 짧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누가 24:51), "들려 올라가셨다"(행 1:9) 이게 전부다. 복음서가 탄생이나 고난(죽음), 부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과 비교할 때, 심히 짧다.

이유는 무엇인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다"는 말씀이 있다. 이는 승천을 전제한 말씀이다.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한데 어우러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이런 말씀들에 착안하였다. 또 한편으론, 죽음을 보지 않고 사라져버린 에녹(창 5:24)이나 엘리야(열왕기하 2장)의 이야기도 참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방세계의 훌륭한 인물들-로물루스(로마의 시조), 헤라클레스, 알렉산더대왕, 아우구스투스 등-의 승천이야기도 참조했다. 말하자면 고대세계에서 위인들의 승천이야기는 특별한 소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승천한 위인들조차도 예수 아래 있다고 믿는 누가로서는, 예수도 승천하셨다는 한마디 말로 족했다.

예수와 작별한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아지트(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를 뺀 열한 명의 제자들,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행 1:14)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와 직접 관련 있는 사람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다 모인 언급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만큼 특별한 장면이다. 이들이라고 생각과 주장이 다 같겠는가, 실제로 이들은 예수 생전에 미숙한 인간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나타냈다. 그러나 지금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의연하다. 예수가 떠나갔는데도 불구하고 한없이 차분하다. 예수의 빈자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로 예전처럼 논쟁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들은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무엇을 기도했는가? 예수의 빈자리를 우리가 채우자고, 약속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예수가 전심으로 이루려고 했던 하나님나라 구현을 이어받자고, 그래서 민중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기도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살았다.

사람 사는 세상은 거저 오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선상을 넘나드는 극도의 위기를 겪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덮치는 모순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때에만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부활을 살아야 한다. 더군다나 이 나라가 가라앉을 위기에 있지 않은가

▲박정희기념관에서 기습시위를 벌인 '청년좌파' 회원들. [출처=청년좌파]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