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42)

요한복음 1:29-34 "하나님의 어린 양"
뉴스일자: 2014년01월21일 17시15분

사람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항목이 있다. 강연장에서 강사를 소개한다든지, 책에서 지은이 소개할 때. 학력과 경력이다. 학벌이나 간판이 좋은 사람일수록 소개가 장황하다. 하지만 그런 몇 줄 양력으로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다. 게다가 그 경력이 민중을 위한 경력은 별로 없다.

▲ 용산참사 희생자를 ‘강제부검’한 정병두 검사가 대법관 후보에 추천되자 용산유가족이 항의하고 있다. [출처=참세상 자료사진]

용산 남일당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을 강제진압하여 학살의 주범이 된 김석기는 공항공사 사장이고, 사건 수사를 지휘한 정병두는 대법관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를 보면서, 그 자리와 경력이라는 게 얼마나 반민중적인가를 새삼 보여준다.

이런 풍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페이스북을 보면, 자기 소개란에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판에 박힌 소개를 볼 때마다 드는 궁금증이 있다. 저 사람의 품성은 어떤가? 이다. 진국인지, 진상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위선적인 사람인지, 신중한 사람인지, 떠벌리는 사람인지, 양심에 민감한 사람인지, 세력에 민감한 사람인지 등 말이다.

외면적인 정보는 이런 점을 아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내면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을 규정하는 통로는 그 사람이 취득한 간판, 외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사람에 있다. 사람은 영적존재이기 때문에 영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내면이 한 사람의 결정적 실체이다.

처음 예수가 사람 앞에 등장했을 때, 예수는 어떻게 소개되었나? 오늘 성경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요한 1:29)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36절에도 나온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예수를 지칭하는 무수한 표현이 있지만, 필자는 이 고백이 그중 가장 탁월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이 표현에는 시대를 꿰뚫는 요한의 통찰력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가장 큰 쟁점은 항상 제사였다. 정의로운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지만, 불의한 제사는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정의로운 제사와 불의한 제사의 차이는 민중을 평등하게 하는가였다.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살인과 탐욕의 제물을 바치는 지배자들의 제사에 대해 넌더리를 낸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11-12, 15절)

예수 당시 제사의 전당인 성전은 불의와 모순이 쌓이고 쌓여서 철저하게 민중을 수탈하는 악법의 소굴로 전락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득권세력의 총집합체인 성전을 전복하려는 예수의 정체를 곧바로 전면화하여 성전청소 사건을 앞부분인 요한 2장에 배치한다.)

죄 속죄를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대제사장과 귀족세력들의 카르텔에서 민중은 갈수록 허덕였고, 급기야 죄인으로 낙인찍혀 체제 밖으로 밀려났다. 율사들은 율법으로 성전카르텔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므로 공범자가 됐다.

이런 시대현실을 직시하는 요한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바는, 제사의 혁신뿐이었다. 요한은 당장 자신부터 물세례를 주므로 민중을 구제했다. 죄사함 받는 성전제사가 필요 없도록.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요한 1:31) 그리고 요한은 이 말씀에서 보듯이, 그분은 물세례보다 더욱 강력한 행위로 민중을 구제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요한이 소개하는 그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이 민중을 구제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어린 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죄 속죄 방법의 결정체이다. 이스라엘의 원조인 히브리들은 애굽을 탈출할 때, 어린 양 한 마리를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장자의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제2 이사야에 나오는 '야웨의 종' 네 번째 노래인 이사야 53장은 어린 양의 희생적 모습을 이상적으로 노래한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사야 53:7)

신약도 예수가 어린 양으로서 흘린 피가 성도의 해방을 이루었다면서,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베드로전서 1:19)

무엇보다도 어린 양의 존재가 가장 빛나는 곳은 요한계시록이다. 계시록은 어린 양이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 심판하고 영광 받으시는 권세자로 나온다.

이렇게 예수는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이스라엘과 민중을 구제한다. 기득권세력들이 탐욕의 수단으로 왜곡시킨 어린 양 제사를 예수가 직접 하나님의 어린 양이 돼서 일거에 전복시키고 바로 잡는다. 그리고 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이 최종권세자로 등장한다. 이 모든 뜻을 담아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한 것이다. 요한이 이처럼 명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한 통찰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알아봄이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요한 1:34)

그런데 요한이 본 장면은 영의 움직임이기에, 사람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식별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요한이 오랜 세월 광야에서 살아온 것을 떠올리자. 도가 출중한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생활과 먹거리가 지극히 단순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궁구하면 통한다고 한다. 게다가 요한처럼 한평생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민중구제, 이스라엘 복구에 전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소리나 영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것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능력이다.

우리가 물질문명과 자본의 세례를 받은 탓에, 하늘과 통하는 인간 고유의 심성을 많이 상실해서 그렇지,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음을 성찰하고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래서 그전에 가득 채웠던 부잡스럽고 번잡한 것들을 다 털어내면, 그 빈자리에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 채워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요한과 예수는 이미 그런 경지에 도달하였기에, 두 선수는 이미 하늘과 통하고 또 서로 알아보고, 자연스럽게 민중구제,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어떻게 해야 하나?

밀양 1차 희망버스 기도회에서 오늘날 광야는 고통의 현장이라고 했다. 고통의 현장에 있으면 권력의 악이 폐부를 찌른다. 민중의 표정에 담긴 애환, 그 속에서 싹트는 형제애는 말이 필요 없다. 이렇듯 현장에 있어야만 깨치는 영성이 있다.

우리가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지 않고, 시대모순에 둔하지 않고, 특히 권력의 실체에 대해 깨어 있고, 하늘말씀과 하늘기운에 귀의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 약자와 민중을 사랑하는 감수성, 시대를 보는 안목들과 접합해서 우리도 충분히 사물의 근원을 깨치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새해도 여전히 하수상한 세월이 계속될 것이지만, 하늘 기운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대동평화평등세상의 기초를 닦도록 힘주시기를 빈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