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은 기억 투쟁의 기회

[기자칼럼] 보수의 아성, 대구를 바꾸는 이데올로기투쟁
뉴스일자: 2014년01월03일 17시37분

정초부터 고교에서 교학사 역사 교과서 채택 논란이 시끌하다. 대구 포산고, 경북 성주고가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했다가 철회했다. 독재와 친일미화 논란을 빚은 교학사 교과서를 몰아낸 것에 박수치는 것으로 끝내야 할까. 문제는 교학사가 아니다. 잊고 싶었던, 망각당한 역사를 스스로 기억하려는 투쟁이 부족하다.

역사는 일어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고려 명종 충청도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저항과 봉기를 우리는 ‘망이망소이의 난(亂)’으로 기억한다. 고려 신종 일어난 노비해방운동도 ‘만적의 난(亂)’으로, 고려 철종 진주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도 ‘진주민란(亂)’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피지배계급의 저항은 체제를 어지럽게 만든 난(亂)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 교과서의 바탕은 왕조를 중심으로 한 사료에 있다. 이 사료를 토대로 하면 저항운동은 모두 지배질서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건에 불과하다. 현대로 넘어와도 ‘광주 폭동’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기억되기까지, 제주4.3사건이 제주4.3항쟁으로 기억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는 억압당한 이들이 벌인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 논란이 일자 스스로 역사교실을 연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근거없는 친일논란도 있었지만 우리는 극단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의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며 "우리나라가 일제시대라는 역사적 아픔을 겪었지만, 한반도 역사발전의 주체는 결코 일제가 아닌 일제에 저항한 우리 자랑스러운 민족"이라고 말했다.

김무성 의원은 일제 강점기 당시 지배를 당하던 우리 ‘민족’을 자기동일시하지만, 오늘날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를 자기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늘날 역사를 지배계급이 알아서 왜곡 없이 기록해주길 바랄 순 없다. 억압받는 이들 스스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투쟁하고, 기록해야 한다. <전태일 평전>, <파업전야>등은 기억을 위한 노동자의 투쟁이었고, 최근 개봉한 <변호인>과 <남영동1985>등은 자유주의자의 기억 투쟁이다. 

▲출처: 김일수, 2004,「대구와 10월항쟁- 10.1사건을 보는 눈, 폭동에서 항쟁으로」 중에서

논란이 된 교학사 한국서는 대구10월항쟁을 10.1사건으로 소개하며 “조선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의 유탄에 의해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 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서술했다.

10월항쟁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 청산에 대한 요구,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벌인 아래로부터의 항쟁이었다. 그리고 좌익척결이라는 이름 아래 10월항쟁 가담자를 사살하고 매장했다. 이후 인혁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까지 이어지며 정부권력은 대구에 ‘보수의 아성’을 견고히 했다.

기회이자 계기는 찾아왔다. 지난 10월항쟁에 대한 기억투쟁뿐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구지역 노동자의 자주적인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기록도 부실하기 그지없다. ‘보수의 아성’ 대구를 바꾸려면 경제투쟁, 정치투쟁만이 아닌 이데올로기투쟁에 힘을 쏟아야 한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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