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귀국을 앞둔 결혼 미등록 이주노동자 펑씨

[기획연재] (12) 마음이라도 편하게 일했으면...
뉴스일자: 2013년11월25일 12시02분

나는 베트남 하이징시의 외곽지에서 쌀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6녀 1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은 못 하고 2년제 농업직업학교에 다녔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우애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20살이 되던 해, 한국에 가서 돈 많이 벌어 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가난을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가족들은 나의 이러한 결심에 많이 망설이기도 했지만 내가 졸라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베트남을 두고 떠나던 그 기억은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해가 200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2년이 흘렀다.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동생 언니도 보고 싶었으나, 여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브로커에게 출국비용으로 9백만 원을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친지와 이웃,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한국에 와서는 그 돈부터 갚아야 했다. 당시 산업연수생 신분은 3년을 일하고, 간단한 한국어 테스트 후 1년 6개월을 연장하는 제도였다.
 
한국에서 처음 일한 공장은 성서공단에 있는 섬유공장이었다. 주야 12시간씩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잠은 회사 기숙사에서 자며 밤낮으로 이 공장에서 4년 6개월을 일했다. 그 공장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7명이 있어서 그나마 한국에서 첫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첫 공장에서는 일을 너무 많이 시켜 힘들었던 기억이 가장 남는다. 기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기계 옆에서 밥을 먹었으니 점심, 저녁 식사시간도 없이 일했다. 그리고 제날짜에 월급이 들어온 날이 없었다. 빚도 갚아야 하며 고향에 매달 돈을 보내야 하나 돈이 제때에 들어오지 않고 늘 밀리니 속상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있을까.

3년이 지나가는 즈음 산업연수생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교대할 반장이 도착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10분 전에 회사에서 나섰다. 시험을 치고 회사로 오자 반장이 큰 소리로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하고서는 딱딱한 원단책자로 머리를 내리치고 또 때리려 하자 화장실로 피해서 오후 내내 울었다. 너무나도 아프고 무서워서 산업연수생 관리하는 중소기업청에 전화하자, 그 직원이 와서야 반장의 사과를 받고 무릎을 살짝 친 걸고 하는 종이에 사인하고 무마했던 일도 있었다.

산업연수생 기간은 끝났으나 떠나올 때 졌던 빚을 갚고 부모님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를 부치고 나니 남은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모으기 위해 미등록 신세가 되어 그 공장을 떠났다. 그 후로 섬유회사 자수일, 자동차 부품회사 조립일, 전자회사 TV 부품 만드는 일 등 성서공단을 돌고 돌았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자동차 램프를 만드는 공장에서 조립과 검사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거나 퇴직금을 못 받은 사례는 늘 따라다녔다.

한국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신랑을 만났다. 당시 서재에서 일하는 이 베트남 노동자는 순박하고 털털했으며 외로운 나에게는 한국에서 겪는 서러움과 고향 생각들을 달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009년에 결혼을 하였으나 둘 다 미등록이라 고향 가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신랑신부 야외촬영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서 밥 한 끼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무렵 베트남 고향에서는 신랑 신부 없이 양갓집이 모여 혼례잔치를 하였다. 영이라는 이름의 첫 애는 2011년 11월에 태어났으며 지금 배 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다. 임신 6개월이 지나면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아마 곧 베트남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부부가 공장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매일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저녁은 잔업을 하지 못하고 6시 반에 아이를 데리러 간다. 아이가 매우 아프면 회사도 못 가고 병원을 가야 하는데 회사에 전화하면 일이 바쁘다며 화를 마구 낸다.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 막막하고 속이 탄다. 게다가 잔업을 못하니 한 달에 겨우 100만 원가량 받는다.

신랑은 새벽 6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용접일을 하니 집에 와서는 방에 눕기 바쁘다. 아이를 보거나 집안일을 별로 하지 못하니 다 내 몫이다. 어쩌다가 아이가 밤에 아프면 밤새 잠을 못 잔 채 회사 가서 일해야 하니 힘들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니 눈물만 삼킬 뿐이다.

우리 부부는 가끔 출입국에 붙잡혀가는 대화를 한다. 내가 잡혀가면 신랑 혼자서 어린아이를 어떻게 키우지? 신랑이 잡혀가면 나는 돈도 얼마 못 버는데 한국에 계속 있어야 하나? 우리는 아직 돈을 더 벌어야 하는데... 그래서 늘 결론은 ‘잡히면 안 된다. 죽도록 도망쳐서라도 안 잡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밤에 잡히는 악몽을 꾼다. 이제 나는 곧 베트남으로 가지만, 신랑은 2년 더 남아 악몽을 꾸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공장에서 한국 사람들보다 조금 더 한다고 생각하며 일을 한다. 그동안 공장생활 하면서 속상한 게 한둘이 아녔으나, 그냥 참는다.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만 다져 먹고 일을 했으며, 어쩌면 밝은 성격 탓에 내가 스트레스도 덜 받는 것 같다. 한국 관리자들은 까시나, 씨팔 등 욕도 많이 하고 빨리빨리 하는 말은 그냥 자동기계처럼 나온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견딘다. 견디지 않으면 한국에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불법, 단속 이런 게 없었으면 좋겠다. 다 착한 사람들이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일하는 동안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 아닌가?

또 우리처럼 미등록이주노동자 부부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주노동자들이 꽤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부모에 따라 아이도 불법이 되어 지원과 보호가 없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과 달리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으며 초등학교도 받아 주는 데가 별로 없다.

한국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부디 안 잡히고 열심히 일하며, 건강하게 베트남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한국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손 잘리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 그분들이 고향땅에 들어설 때의 심정은 정말 어떻겠는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국을 떠난다. 한 마디로 한국 참 좋다. 일자리도 있고 돈이 있으면 아주 편하다. 대형마켓에는 없는 것이 없고, 병원도 가깝다. 이렇게 편한 생활은 베트남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아쉬운 것도 참 많다. 그동안 10년 이상 살면서 일요일에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했으며, 미등록이라 가족과 놀로도 변변히 가지 못했다. 이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니 어서 가족들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 후 2년만 더 기다려 신랑이 돌아오면 베트남에서 가족여행이라도 한 번 가야겠다.

한국에 있는 동안 따뜻하게 이주노동자들을 지원해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들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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