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 학생운동, 정당운동이 설국열차를 타고 운동의 빙하기로 질주하고 있다. 운동의 주체들은 고령화하고, 새로운 운동 주체들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있다. 대선에 불법 개입한 국정원을 질타하는 집회에 4~50대가 주로 참여했듯이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세상사의 변화에 무감하다. 스페인의 청년 실업률이 4~50% 되듯이 자본주의의 위기는 고용의 위기와 연동되어 젊은이들의 시선을 스펙과 취업에 집중시키고 있다.
대학은 대학대로 취업양성소 내지는 수익업체로 전락하고, 세상사 변화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을 화성인으로 만들고 있다. 수 십 년 만에 찾아온 폭염의 날씨 탓일까. 사람들의 기력이 눈에 뜨이게 떨어져 있고 자본주의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운동 주체들은 탈진 내지는 소진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10년, 20년 후 누가 촛불을 들고 누가 저항할 것인가? 조바심 섞인 어투로 말하자면, 과연 저항할 주체가 남아 있기라도 할 것인가? 자본이 위기에 빠질수록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강도는 그 도를 더해 갈 터인데 어떤 주체들이 국가와 자본의 협공에 저항할 것인가? 피 터지는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주체적인 의식은 거세되어 있고 대다수 젊은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생존의 정글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먹으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던 꼬리 칸의 사람들이 열차의 엔진이 있는 머리 칸을 공격하듯이 자본의 엔진을 공격할 주체들은 과연 생산되고 있고 생산될 수 있는가?
노동자들의 수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변혁은 커녕 변화의 물결도 가시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은 탈진한 것인지 자기 세력의 보신주의에 함몰된 것인지 몰라도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입으로는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나 발길은 정파를 알리바이로 삼아 지자체 선거 등 각종 선거에 몰입하거나 자기 세력 몸집 불리기에 정신이 없다.
오늘날 과연 무엇이 노동운동을 질곡 상태에 빠트리고 있는지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다. 저항의 주체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들이 정파적인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며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위에 단일한 이념으로 대동단결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이 운동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갈 길은 멀고 현실은 불투명하다. 지리멸렬해진 노동 속으로 자본은 꾸준하게 개입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과 싸우고 투쟁하는 것이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인가? 자본의 집행위원장인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 어디 우연으로만 가능한 일일 것인가?
자본주의라는 설국열차 또한 현재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산산조각 나듯이 2008년 금융공황 이후 자본주의는 점점 더 회복세를 잃어가고 있다. 공황의 쓰나미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들을 절대 보호하지 않는다. 국가와 자본에게 노동자는 싼값에 노동력을 공급하는 희생양일 뿐이다.
<자본론>만으로는 세상이 변혁되지 않는다. 노동자 내부의 적과 싸우고 정파 간의 진정성 있는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변혁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 구조는 인식하고 있는지 몰라도 마음이 엄한 곳을 쳐다보고 있다면 백해무익 아닌가?
마음을 다시 묶어야 한다. 폭염이 차츰 한 풀씩 꺾이고 있는 계절이다. 마음을 다시 잡아매야 한다. 소통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정파의 이익을 넘어 좌파의 이념 아래 소통의 구조를 만들자.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뜨거운 가슴들을 만들자. 10년, 20년 후 운동주체들의 소실을 염려하는 것이 노파심이나 기우로 끝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주체들의 생산과 재생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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