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31)

누가복음 12:49-53 "사람을 살리는 불"
뉴스일자: 2013년08월20일 12시28분

독설하면 김구라이고, 돌직구하면 삼성라이온즈의 오승환이지만, 예수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독설가요 돌직구 소유자이다. 체면과 교양으로 똘똘 뭉친 현대인에게 예수는 관계 맺기 어려운 사람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말씀에도 예수의 그런 면모는 물씬 풍긴다.

예수가 던지는 돌직구를 보자.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현대교양의 정설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분에 대한 고려 없이, 부드럽게 말하지 못하고, 직설적인 말은 관계를 깨고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예수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무대뽀이다. 대중의 정서도 감안하지 않고, 마구 돌직구를 날리니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평화와 화해, 온유함의 대명사인데,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의 그런 선입견을 산산조각낸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예수의 돌직구 말씀 이해를 돕는 한 실화가 있다. 제목은 '마을에 불 지른 할아버지'이다.

옛날 이웃 나라 일본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마을의 동쪽은 큰 바다지만, 서쪽은 높은 산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산비탈을 일궈 만든 논에서 일했고, 몇 사람만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다.

아침마다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산비탈을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면 산기슭 오두막에 내려와 잠을 청했다. 그러다 보니 산 속 동물들에게서 사람들의 논을 지키는 일손이 필요했고, 마침 마을에서 손자 한 명과 사시던 할아버지가 그 일을 맡았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뜨거운 햇볕에 누렇게 익은 벼들을 추수할 때가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할아버지는 매일 하던 대로 해돋이를 보려고 산 위 벼랑으로 올라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일찍 일어나 논으로 일하러 올라가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벼랑 위로 올라오신 할아버지는 아까부터 저 멀리 떠오를 해를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할아버지 눈에 해 아닌 다른 것이 들어왔고, 할아버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란 할아버지는 허둥지둥 움집으로 달려와 아직 자고 있는 손자를 깨웠다.

“일어나라, 어서!” “음, 더 잘래.” “안 돼! 어서 일어나 불붙은 장작을 가지고 따라와!”

손자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소리 지르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에 얼른 일어나 불붙은 장작을 들고 할아버지 뒤를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벌써 저만큼 달려가는 중이었다.
“논에 불을 질러라!” 할아버지가 벼에 불을 붙이며 손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이건 마을 사람들이 먹을 양식이잖아요? 이렇게 다 자랐는데 여기에 불을 놓으면 모두 굶어서 죽을 거예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어서 시키는 대로 해!”

할아버지의 호통에 손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와 함께 마른 벼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방 논에서 피어 오른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것저것 농사 준비를 하던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산 위 불타는 논을 쳐다보고는 비상종을 울리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산비탈 논으로 달려 올라왔다. 그들이 산 위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모든 것이 타버리고, 검은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났다.

“아니, 도대체 누가 불을 질렀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서며 말했다. “내가 불을 질렀네.”
“아니 왜요? 이제 추수만 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일이세요?”
“저길 보게나.”

할아버지의 말씀에 사람들이 모두 그 곳을 쳐다보니, 산더미 같은 파도가 해변 쪽으로 마구 달려들고 있었다. 거대한 해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을 휩쓸어 집들을 종잇장처럼 구기고 부서뜨렸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파도에 쓸려가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러자 한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목숨을 구한 거야. 자 봐, 모두 다 살아남았잖아.”
“맞아요. 목숨을 건졌으니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지혜와 용기로 우리를 살려주신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에게 고마워했고,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살짝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신학연구소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16-17쪽, 798호)
▲쓰나미에 휩쓸린 일본 후쿠시마

그 불은 사람을 살리는 불이었다. 일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단시간에 신속하게 대피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할아버지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양식을 다 태워버리는 그 불이 재앙인 줄 알았을 거다. 그러나 그들은 양식을 잃은 대신에 목숨을 건졌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그 시대를 구하기 위한 불이다. 이처럼 불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태워서 없애버리는 소멸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이 예측하지 못하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또 다른 기회는 무엇인가? 분열로 인한 삶의 재생이다. 복음말씀은 분열의 적나라한 실례로 한집안 다섯 식구의 갈라짐을 말한다.

"이제부터 한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누가 12:52-53)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끔찍한 분열이다.

맞서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임을 주목하라. 복음서 기자가 이런 극심한 분열을 말하는 데는 이미 초기 예수시대에 그들이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즉 예수는 가족의 분열을 겪었다.

마가 3:21 말씀,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의 가족들이 그를 찾으러 왔다.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가 10:29-30 말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예수도 제자들도 일찌감치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로부터 일차적으로 박해와 배제를 당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듯이, 가족이 제 뜻에 공감해 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겪을 수 있는 모든 분열적 고통을 거친 후 독립 자생을 위해 출가하게 된다. 극심한 분열적 고통 와중에 부모와 자식 간에 의가 끊어지는 것은 피치 못할 인간사이다. 더군다나 그 부모가 세력자인 경우라면, 말해 무엇하랴!

대구에서 선거 때만 되면 심심치 않게 듣는 에피소드, 부모와 자식 간에 지지정당이나 후보가 극명하게 달라서 논쟁하다, 설득, 타협이 안 돼서 결국은 파국을 맞이하게 되고, 그것을 피하려고 정치이야기는 일절금지라는 불문율도 있지 않은가?

부모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완강하게 지배세력을 옹호하는가? 민중을 해방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어째서 그리도 한사코 알아보질 못하는가?

그만큼 지배세력이 구축해 놓은 체제가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쌓아놓은 질서, 인맥이 주는 열매는 뿌리 깊으며, 달콤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그 세계 속에서 기생, 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는 불을 질러야 하고, 분열을 일으켜야 한다. 불 뒤에 정화된 사람만이라도 구원받도록, 분열 뒤에 새로 세상을 자각한 사람만이라도 구출하도록.

변화를 두려워하여 명백한 새 세상으로의 초대를 거부하고, 기존 세상만 움켜잡는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불과 분열은 그들의 잠긴 눈과 귀를 열게 하기 위한 예수의 극약처방이다. 처방전을 믿고 안주함과 두려움을 떨치고, 내일의 해방세상으로 가자. 

▲삼성 규탄 집회 [출처:삼성일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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