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28)

누가복음 10:1-11, 16-20, "먼지를 떨어버려라"
뉴스일자: 2013년07월10일 21시27분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께서 제자 70인을 세워서 전도활동을 위해 모든 고을에 보내셨다는 이야기이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누가 9장에서는 열 두 제자를 보내신다.
 
즉, 열두 제자를 세운 후 곧바로 일흔 제자를 또 세우셨다는 말이다. 예수는 조직의 귀재란 말인가? 활동가들은 알 것이다. 한 사람 세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런데 예수는 그토록 힘든 일, 사람을 세우는 일을 척척 잘도 하신다.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일단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 이 일부터가 예민한 통찰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교육하고 조직하고 훈련해서, 독자적으로 설 수 있도록 키우는 과정을 다 거친 후에라야 한 사람을 세울 수 있다. 아무나 덥석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곡절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싹수가 없는 사람이 허다하고, 처음에는 같이 시작했더라도 중도이탈자도 나오고, 훈련을 끝까지 마쳤어도 전혀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까지. 그런 와중에 70인 제자를 세웠다는 것이므로 예수일행의 여건상 역사적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예수그룹이 그렇게 큰 세력이 못 된다. 호시탐탐 기득권세력이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상황에서 공안의 감시를 피해 이 고을 저 고을 게릴라식으로 견유생활을 하는 예수일당이, 고정적인 장소에서 하부 기반이 튼튼한 가운데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가능한 70인 조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뭔가? 누가저자의 바램을 예수의 입을 빌려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실 복음서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긴 하지만, 실제 예수의 원음은 극히 일부이다. 그 외는 초기교회가 예수의 입을 빌려서 하고 싶을 말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가복음을 쓴 연대가 80년대 후반 이후다. 즉, 예수 사후 50년도 더 지난 시점이다. 저자가 복음서 쓰는 동기에는 예수의 원음과 행적을 증거하는 일 못지않게 저자가 발 담그고 있는 공동체 상황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직면한 시대 속의 공동체 문제(대개는 위기인)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예수의 입을 빌려서 최초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가장 명약이다.
 
70인 제자 파송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예수와 70인의 제자

문자 이면에 담긴 뜻을 캐보자. 제자 열둘은 이스라엘 십이 지파를 상징한다. 이제 이스라엘을 새롭게 대표할 그룹이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70인은 뭔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수이다. 로마가 지배하는 족속의 숫자도 상징한다. 완전하게 꽉 찬 수이다. 왜 예수일행에게 전 세계를 대표하는 70인의 제자조직이 필요하단 말인가? 제국에 저항하는 새로운 대안질서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누가는 자신들의 믿음의 주 예수가 현재 질서인 로마제국 체제를 충분히 능가하고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세력임을 증거하고자 한다.

그런 전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당대 사람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다. 바로 전도자의 윤리이다. 예수는 일꾼을 보내면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한다. 여기 이리는 로마의 폭력체제를 말한다. 예수일꾼들은 제국질서 속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는 한 마리 양이다. 이런 무방비상태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그들의 가치를 증거하며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누가의 문제의식은 피지배지역을 수탈하는 황제사절의 탐욕스러움에 기초했다. 하나님나라 사절은 황제사절과는 뼛속부터 달라야 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로마체제에서 신물이 나게 겪은 폭력(침탈과 강탈)과는 전혀 다른 처신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일꾼으로부터.

어떤 모습인가? 먼저 일꾼들은 전대(돈주머니)도 자루(식량)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명을 받는다. 예수는 일꾼들이 삶의 근거를 대비하는 일을 아예 원천 차단한다. 어떻게 살라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전도자의 본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자도 사람이기에 전대나 자루가 비어 있으면, 틀림없이 본연의 임무보다는 전대 채우기에 골몰할 것이다. 제사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이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원인제거 차원에서 전대와 자루 휴대금지를 명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는 말씀은 또 뭔가? 다른 일에 주의를 분산하지 말고, 오직 본분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전도자의 본분은 무엇인가? 하나님말씀 전하는 일이다. 인기관리나 재물획득이 아니다. 인사는 그런 목적에나 필요한 일이다. 인사는 하나님 말씀 수행과는 하등 관계없는 인적행위이다.

예수는 일꾼들을 영접하는 집에서의 처신도 하달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제국관료들은 황제나 원로원과의 인맥을 과시하며, 거들먹거리며 사람들을 들볶았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제국과 완벽히 다르게 처신해야 한다. 상대가 누구든, 차별 없이, 아부하거나 괄시하지 말고, 공평하게 주님의 인사를 해야 한다. 전도자 개인의 이해관계 따라, 환심을 얻으려고 사람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 사이를 다스리는 법은 오직 하나님의 평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또 한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만)을 먹고 마시라고 했다. 왜 그런가? 다니다 보면, 더 호의적인 사람을, 더 쾌적한 집을, 더 잘 먹는 집을 만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집저집 옮겨 다녀서는 안된다. 얄팍한, 속 보이는 짓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전도자의 위신을 깎아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처신윤리는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절정을 이룬다.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거든, 발에 묻은 먼지를 그들 보는 앞에서 떨어 버리라고 했다. 영접해 달라고 매달린다든지, 동정을 사는 행위를 한다든지, 미적거리며 마음이 바뀌기를 사정한다든지, 하지 말고 단호하게 처신하라.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 하나님나라 소식은 고귀하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그 귀한 소식도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제국의 지배를 영속시키려는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전파하자면 철저히 다른 삶을 살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예수는 그 대안윤리로 청빈한 삶, 공평한 사람관계, 이익을 따르지 않는 우직함, 진리에 대한 단호함을 제시했다. 현실은 어떤가?

▲사랑의교회가 서초구에 새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특혜 의혹이 불거졌다. 공공 도로 지하 점용과 지하철 입구 연결 등 각종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대구이주민선교센터 박순종 목사(오른쪽)가 대구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이혼한 결혼이주여성 강제출국과 관련한 항의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생활양식이야 시대변천에 따라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복음일꾼의 정신은 예수 시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현실을 목도한다. 청빈보다는 부를 사랑한다. 부와 권력에게는 온통 호의를 담아 평화의 인사를 남발하지만, 진실로 평화가 간절한 사람과 현장에게는 묵묵부답이다. 한 집에만 머무르기는커녕, 이익을 따라 영혼을 바치는 불나방이 됐다. 심지어 복음조차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을 부추겨주는 성공소재로 각색시켜 버렸다. 정말이지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들이 많다.

단호하게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전대를 채워줄 유력한 사람이라면 발의 먼지를 떨기는커녕, 놀라운 친화력으로 관계를 삼는다. 예수는 사라지고, 자신의 탐욕만이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세속욕망과 보조를 맞추면 맞출수록 그와 반비례로 복음의 권위와 가치는 추락한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내 실속만 채우면 그만이다. 그래서 예수는 경고한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정녕 지혜로운 사람은 치부책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 하늘책이 마지막으로 그 사람 결정판임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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