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맨날맨날 멘붕하는 진냥의 추천만화'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 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캣스트릿>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꽃보다 남자>의 작가 카미오 요코의 만화라는 점이 책을 집어 들게 했다. 90년대에 <오렌지보이>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꽃보다 남자>를 접했었던 나는 ‘난 <오렌지보이>도 아는 사람이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구혜선 주연의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봤었다. 그러고보면 멘붕독서에 추천한 만화 중 상당수가 90년대 해적판으로 한국에 소개된 작품들이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랄까. 그런 감상에 젖어 책장을 펼쳤었다.
<캣스트릿>은 ‘엘리스톤’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엘리스톤’은 프리스쿨인데, 한국에서는 ‘preschool(유아학교 혹은 유치원)’과 혼동되어 잘 쓰지 않는 ‘프리스쿨(free school)’이란 말은 ‘자유학교’라는 말로 종종 번역된다. 뜻은 교육과정에 대한 자율권을 폭넓게 가지고 있는, 일종의 대안학교다. 주로 미국의 대안학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럼, 대안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글쎄... ‘프리스쿨에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캣스트릿>의 이야기가 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스톤에서 만나고 엘리스톤에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공간적 배경이 학교에 국한되진 않는다. 한국의 청소년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이 ‘학교-집-학교-집-가끔씩 학원이나 집 앞 놀이터’ 정도인 것과는 다른 느낌. 심지어 엘리스톤은 출석 개념이 없어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얼마 동안이든 가지 않아도 된다. 입학 개념도 없어서 그냥 어느 날부터 나가면 된다.
주인공 케이토는 유명한 아역배우였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로 친구 하나 없이 힘들어하다가 겨우 사귄 친구에게 상처를 받고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가 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옛 동창 코이치. 코이치는 엘리스톤에 와보라는 말을 남긴다.
“텔레파시가 왔다. 내일 또 만나자...는.”
뒷모습에서 느낀 텔레파시를 쫓아 엘리스톤에 나가기 시작하는 케이토. 케이토는 그곳에서 또 다른 친구 모미지를 만난다. 모미지는 항상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로리타 드레스를 직접 만들어 입고 다니는 사람이다.
난 고등학교 가자마자 바로 중퇴했거든.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교복에 싸여 지내는게 못 견딜 것 같아서
한번은 이런 모습으로 갔더니
바보 취급을 하더라.
친한 친구한테도 따돌림당해서 그냥 그만둬버렸어.
그래서
이 옷으로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어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뭐가 나빠?
여지없이 ‘이상한 애’로 보이는 모미지였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컷에서 모미지는 마치 자유해방선언을 외치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게 뭐가 나빠?
내가 아는 어떤 이도 까만 머리카락 색깔을 하기 싫어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고등학교 중퇴나 홈스쿨링이 제법 ‘흔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학업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학교가 너무 힘들어서 다니지 못했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머리를 염색하고 싶어서’ 자퇴했다는 말엔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왜?
모미지의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줄 거라는 말은, 그리고 히키코모리였던 케이토가 프리스쿨을 다녀보겠다 마음먹게 된 이유는 내가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캣스트릿>이라는 제목답게 엘리스톤은 건물 안이나 교실의 모습보다는 길의 모습으로 더 많이 비춰진다. <캣스트릿>을 읽으며... 내게 학교는 ‘교실’이고 ‘삶터’이며 집합소였는데 어쩌면 학교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사람들은 학교를 ‘미래’를 위한 곳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학교는 지나쳐가는 ‘길’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왜 난 항상 학교를 생각하면 텅 비고 항상 그 안에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벽으로 둘러쳐진 곳이라고 느껴지는 걸까. 왜 그곳은 어딘가로 나아가거나 열려있지 않고 ‘정지’해 있고 ‘반복’되는 걸까. 그리고 그 공간에 머무르는 그 시간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질까. 그냥 길인데.
나는 학교를 다닐 때 내가 호랑이나 표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되고 싶은게 아니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캣스트릿>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고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상관없다 말했다. 다른 이가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든.
“천천히 하자. 복잡한 일도 많지만 소중한 걸 잃지 않도록.”
들고양이들의 거리 캣스트릿. 학교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했던 이 만화책으로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소논문을 하나 써 발표하기도 했었다. 제목이 ‘방랑학교’였는데 글이 자부심을 느낄 만큼 잘 써졌다기보다 발표했던 그 경험 자체가 재미있었다. 상상해보라. 교육학 교수와 학생들이 만화책 내용을 필기하고 있는 모습을. 재밌지 않은가. 유해미디어 취급을 받는 만화를 말이다. 유쾌한 경험이었다.
아, <캣스트릿>에는 <꽃보다 남자> 못지않은 온갖 러브스토리들도 많으니 그 점 유의하고 봐야 한다. 사실 충격 반전 러브라인 만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엘리스톤의 교장선생님도 짧게 짧게 출연하는데 찰나로 지나가는 요 인물도 주목할만하니 챙겨보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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