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24)

요한복음 17:20-26 "살아서 단결하자"
뉴스일자: 2013년05월15일 08시42분

교회 성서학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재 끝 부분에 있는 적용문제로 교회의 병폐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성경 질문에는 소극적이었던 분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여러 느낌을 쏟아냈다. 쌓인 게 많았던지 내가 미처 말할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회사가 고객 관리하듯, 교회도 교인을 행정관리 대상으로만 삼는다는 것이다. 교우 개개인이 교회를 유지하는 많은 대상 중 하나에 불과한 거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과는 거리가 멀다. 사업체이기 때문에 세습도 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보다는 교회에 많은 지분이 있는 사람의 뜻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런 실례를 일일이 말하자면, 교회에 정나미가 뚝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옳지 못함을 인식하지만, 그런 병폐를 개선하기에는 힘이 부치고, 나섰다가는 거기서 발생하는 희생이 워낙 큰지라 대개는 단념한다. 교회를 다니는 최소목적이 간신히 자기 신앙을 지키는 데 머무르고 만다.
 
구원과 안식을 얻고자 교회에 왔지만, 영생진리에 대한 열망은 식어버린 지 오래고, 그냥 사람 관계에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으면 대만족이다. 교회도 사람들의 기호를 만족하게 해 줄 각종 프로그램 양성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한다. 여기서 또 자연스레 그렇게 할 수 있는 교회와 역량이 모자라서 못하는 교회 간에 양극화가 발생한다.
 
이렇게 개인이든 교회든 현실에서 살아남는 데만 급급하므로, 교회가 해야 할 그 이상의 가치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선다든가, 사랑의 공동체를 보여준다든가, 불의한 세상을 밝히는 등대의 역할 같은 고유한 기능은 쇠약해진 지 오래다. 이제는 되레 정의로운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어쩌다 민주주의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행위를 공격하는, 가치역전의 시대가 돼버렸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타락의 흐름 속에서도 신앙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고자 주류를 거스르고 떨치고 일어나는 갱신 세력이 항상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민중사제들이 오경을 편찬해서 야웨신앙을 사수하였다든지, 로마의 압제와 유다괴뢰정권의 이중삼중 압제 속에서 민중을 구원하고자 등장한 예수라든지, 그 예수운동을 계속 이어나간 제자들이 그런 경우이다. 오늘날에도 기성교회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분투하는, 예수를 따라 살려는 대안교회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요한복음 이야기도 똑같은 위기 속에 처한 요한공동체 교회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했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요한공동체교회에 당면한 위기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존이다. 살아남는 것.
 
우선 요한복음에 대해 기본적으로 확인할 게 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100년도 훨씬 지난 시점에 썼다. 최소 백 년이고, 훨씬 후대로 잡기도 한다. 쓰인 시기가 후대라는 뜻은 예수의 원음(원래 말씀과 행적)을 증거하기보다 교회의 상황을 훨씬 더 많이 반영했다는 말이다. 그때까지도 미처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을 추가로 발굴해 증거하기보다, 이미 다 나와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교회의 상황에 맞추어서 신학화했다.
 
우리가 어떤 당부의 말을 할 때는 옳은 길을 가자는 강조의 뜻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 여러분, 단결합시다"고 할 때는 매우 비상한 상황이 닥쳐서이다. 단결하지 않으면 노동자 조직이 무너지고, 노동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단결하자고 말한다. 즉, 어떤 말이든 때와 상황에 따른 요구가 있다는 뜻이다.

요한공동체교회도 바로 그런 현실에 따른 요구와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요한복음이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요한공동체 상황의 구체적인 반영이다.

▲대제사장으로 기도에 나선 예수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의 기도형식이다. 예수의 대제사장 기도라고 부른다. 절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이름을 빌었다. 복음말씀에서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표현이 있다.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무려 세 절에 걸쳐서 연거푸 강조하고 있다. 17장 21절, 22절, 23절이다. 여기 나온 그들은 미래공동체이다. 20절 말씀,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현재는 없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지만, 우리를 통하여 믿게 될, 내일의 공동체를 위해 비는 기도이다. 그런데 요한 저자는 앞부분에서 현재의 공동체에게도 똑같은 기도를 한다. 11절 말씀,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즉, 현재공동체와 미래공동체 양쪽 모두를 위한 기도요지가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이다.

왜 이렇게 하나가 되기를 간구하는 것인가?

요한공동체를 덮친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이단집단으로 낙인찍혀 쫓겨났다. 종교가 모든 것을 장악한 고대사회에 종교공동체에서 출교당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주류가 예수무리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출회, 출교가 나온다. 고대공동체에서 출교는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주류의 배척으로 소수자가 된 그들은 무엇보다 생존해야 했다. 또, 처음에는 같이 있다가 다시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한 사람이 아쉬운 소수자 안에서 사람이 떠나는 것만큼 아픈 일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연속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배격하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소수자들이 어떻게 목숨 부지와 사회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그들 서로 서로가 흩어지지 않고 결속력을 더욱 단단히 유지하는 길뿐이다.

여기서 요한공동체의 낙관적 의지를 본다. 사실 누구나 현재를 위해서 기도 하기는 쉽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처럼 요한공동체는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미래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한다. 

▲ 예수운동을 펼치기 위해 모인 이들

지금 당장 죽겠는데, 거기에 파묻히지 않고, 미래공동체의 일치와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공동체가 극심한 위기와 시련 속에 있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탄압을 이겨내고, 반드시 내일 미래의 공동체로 이어진다는 강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요한공동체의 낙관적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됨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계속해서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시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고.

오늘 복음말씀이 나오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가 체포당하기 직전이다. 즉 예수의 기도는 유언이다.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매우 엄중한 상황이기에 예수의 유언형식을 빌어서, 반드시, 꼭 그렇게 해야 하는 말씀으로 이 자리에 배치했다.

살아남기 위하여 하나가 되자는 말이 어찌 요한공동체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오늘날 곳곳에서 권력과 자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민중과 노동자, 약자인 ‘을’의 처지를 보자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혼자 객체로 머무는 일은 답이 아니다. 서두에 교회의 병폐를 목도하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간신히 자신의 신앙만 지키는 자리에 머무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신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 폐단의 화살이 자기에게 오지 않았을 뿐이다.

▲남양유업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민
 

우리 사회 약자계급의 수많은 민생이 차별과 불의에 둔감하고, 공분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직 자신은 살만하다는 착각, 오판에 불과하다. 언제 그 갑의 횡포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른다. 그러니 어찌하면 되는가?

첫째 살아남는 것은 최선의 덕이다. 여하튼 살아남자. 둘째는 소극적 생존을 떨치고, 존재감을 펼치도록 단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먼저 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의를 추구할 사람들도 예비해 두었다. 낙관적 의지로 돌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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