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또 하나의 희생자, 지하철해고노동자

참사 원인 1인승무제 폐지, 안전인력충원 요구했을 뿐인데...
뉴스일자: 2013년02월22일 20시25분

지난 21일 대구도시철도공사 월배차량기지사업소 대구지하철노조 사무실에서 지하철해고노동자 전경배(44)씨를 만났다. 전씨는 1997년 지하철 역내 자동표발매기, 자동게이트 등 전자기기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직종으로 대구지하철공사에 입사했다. 그는 대구지하철참사 발생 당시 중앙로역에서 9구간 떨어진 송현역에서 근무 중이었다.

전씨 등이 속한 대구지하철노동조합은 참사 이후 대구도시철도공사에 1인승무제 폐지, 안전인력충원 등 참사 재발 방지책을 요구하며 2003년 6월과 2004년 7월 두 차례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일정 부분 안전 인력을 충원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13명의 해고자를 만들었다. 참사가 낳은 또 다른 희생자들이다.

▲ 지난 17일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열린 대구지하철참사 추모시민문화제 한 청소년이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대구지하철참사... 그리고 지하철노조 파업

“당시엔 근무 나갈 때 근무복을 못 입게 했어요. 고동색 점퍼 도시철도공사 근무복이 있는데 그걸 못 입게 했었어요. 워낙에 분위기가 안 좋았으니까...”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 사상 최악의 대구지하철참사 이후 도시철도공사의 직원들은 단지 공사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미흡한 초동 대처가 사고를 키웠고, 마스터 키를 뽑고 혼자 대피한 기관사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동료 직원 5명도 그날 사망했지만 가족을 잃은 이들의 분노와 원망을 그들은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개만 떨군 채 죄인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만약 또 다시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찌될까를 고민하고,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참사 이후 수차례 바뀐 지하철공사 사장들은 무엇하나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지 않고, 자리를 옮겨갔다. 참사 이후 2년 동안 지하철공사 사장은 권한대행을 포함해 4차례 바뀌었다. 그러니 문제점을 수정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건 직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참사의 원인을 지하철공사가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필수 안전 인력을 감축한 것에서 찾았다. 특히, 대구지하철공사는 1998년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 애초 지하철 앞뒤로 한명씩 기관사 두 명이 탑승하던 2인승무제를 폐지하고 한명만 타는 1인승무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돌발상황이 발생할 경우 기관사 혼자서 종합관제센터와 교신을 하며 초기 대응을 하고, 수많은 승객을 대피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시 대구지하철노조는 1인승무제 폐지를 비롯한 안전 인력 충원 문제를 지하철공사에 집중적으로 요구했고, 급기야는 파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두 차례 파업은 대구지하철노조 뿐 아니라, 서울, 부산, 인천 등 전국의 지하철노조가 함께 했다.

하지만 2004년 파업은 대구에서만 13명의 해고자를 낳았다. 지난해 폐암으로 갑작스레 사망한 1명을 제외하고 12명의 해고자가 오늘까지 여전히 복직을 기다리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인천, 부산, 서울 지하철 해고자 대부분 복직
남편 일하는 모습 확인하고서야 울음 터트린 동료 아내
“우리도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최근 몇 년 사이 인천, 부산, 서울 등 2004년 당시 함께 파업하며 해고된 노동자들 대부분이 복직됐다. 김범일 시장만이 유일하게 “기본질서가 무너진다”는 이유로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 전경배씨

전씨는 “인천에서는 송영길 시장 부임 후 복직이 이뤄졌는데, 한 동료는 그 소식을 아내에게 알렸지만, 믿지 않고 직접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확인하러 왔다고 하더라. 남편이 업무를 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주저앉아서 울었다고 한다”며 “우리도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참사가 발생하고 노조에서 다른 지하철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누고 문제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참사가 발생하진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그래서 노조에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고, 2003, 04년 단체협상을 진행하면서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라고 요구했다”고 참사 이후 파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동료들에게 잊혀간다는 것이 가장 힘들어”
인천에서 일하는 꿈 꾸고, 사망한 해고자 동료

당시 노조 조직부장이었던 전씨는 파업 주도, 업무방해 등의 이유로 노조위원장 등 다른 간부 3명과 징역 및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공사는 기다렸다는 듯 법원 판결을 근거로 이들에게 직위해제를 통보했다. 2005년 4월의 일이다. 그 이후 올해로 8년째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가장 힘든 점은 우리가 잊혀간다는 거다. 동료들조차 ‘아직 해고자가 있냐’고 말하곤 한다. 또 복수노조가 생기면서 당시 함께 싸웠던 이들이 떠나간 것도 많이 힘들었다”

전씨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해고자들도 육체적, 금전적 어려움보다 동료들에게 잊혀간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피로감을 많이 느낀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폐암으로 사망한 동료도 무척 건강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헬스도 하고 해서 몸이 단단하고 건강했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폐암이라고 가버렸다. 해고 이후에 이혼과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건강을 급격하게 나쁘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죽기 전에 해고자들이 복직된 인천에서 일하는 꿈을 꿨다고 말했었는데...”

8년을 해고자라는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전씨지만 그는 그때의 선택과 파업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와 같은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일이지만, 만약에라도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계속되는 1인승무제를 폐지하고, 무인으로 운행된다는 3호선의 안전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험요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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