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청소년이 국가와 학교의 백댄서인가?

등급을 권유하는 짐승 사회에서 살아가는 10대
뉴스일자: 2013년01월28일 12시04분

청년과 소년이 적당히 섞인 청소년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이름이다. 배제된 자들이 어찌 청소년뿐 이겠는가. 동성애자, 29만 명의 성매매 여성, 장애인, 죄수, 주민등록증 말소자, 지문날인 거부자, 병역거부자, 미혼모 등 정치에서, 국민 국가라는 틀에서, 시민이라는 이름에서 배제되고 축출된 이름은 한국 사회에 널려 있다.

KBS1에서 방영된 독립영화 <릴레이>에서처럼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고 아이를 키우려면 왜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학생 시절에 임신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 때 세대에 관한 논쟁이 잠시 있었다. 20~30대와 50~60대의 세대 간의 차이가 판을 갈랐다느니 50대가 보수의 손을 들어 줬다느니 하는 논쟁들이었다. 대선 당시에 손수조가 어떻든 또 다른 누가 어떻든 10대는 ‘쪼끄만 놈’들로 치부되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으로 핍박 아닌 핍박을 받으며 정치에서 배제 축출되었다.

항간에서 ‘10대는 무섭다’는 말이 떠도는 것은 10대들의 욕망과 좌절을 묻지마 식으로 뭉개고 도외시한 결과인지 모른다. 어쨌든 10대는 그만큼 무섭고, 그래서 그들을 시민권의 틀 밖으로 추방해 버렸는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이라는 듣기 거북한 이름을 가진 10대들은 ‘등급을 권유하는 짐승 사회’에서 살아간다. 소 돼지도 아닌데 1등급부터 9등급의 낙인을 받으며 살아가는 10대들은 국가의 보물찾기 시험이라는 덫에 걸려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교사와 학교, 학부모는 국가의 마름들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는 드라마 <7급 공무원>에서 보듯이 온통 ‘등급제’다. 성골 진골 이하 8두품의 신라 시대 신분제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처럼 1두품에 속한 사람들은 청담동에서 앨리스가 되기에 십상이다. <시크릿 가든>이 존재하지 않은 이러한 카스트 제도 아래에서 10대들은 서로 청담동의 앨리스가 되기 위해 국가의 억압 장치인 학교에서 사육되고 국가에 의해 1등급 품질을 보증받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10대들은 인권도, 수업권도, 정치적인 권리도 없이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옵스큐리티obscurity(사람들에게 잊혀진) 상태에서 살아간다. 청소년이란 말이 10대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현실에서 10대들은 성인 - 되기를 거부당하고 성인으로 청년으로 표상되지도 나타나지도 못한다.

그 결과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거세다. 그들은 영원히 청소년이라는 표상에 갇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제목처럼 양철북 ‘소년’으로 머물러야 한다. 그들에게는 성장통이 있음에도 성적 외 일체의 성장이 중지되어야 한다. 주체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설정할 정치적 자유는 없다. 국가와 학교가 공모하여 그들의 정치성을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대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주장하면 교육감의 배후니 하면서 백댄서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타남의 정치, 시작함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10대들은 이제 청소년이라는 어두운 이름, 배제된 이름을 거부하고 정치적 주체로, 교육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국가와 학교의 보물찾기에 동원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이어야 한다.

대학교 1학년이 고등학교 4학년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지금 10대들을 유치한 상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교육은 중지되어야 한다. 40대들, 혹은 50~60대들의 노회한 사람들이 운동하는 지금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20대의 정치적 배신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10대들과의 대대적인 정치적 만남이 아닐까? 10대들은 소년도 청소년도 아니다.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이미 다 커버린 주체들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바리케이드 앞으로 총알과 총을 가지러 가다가 죽는 소년병 가브로쉬 같은 정치적 주체의 형성은 2013년 이후 한국 사회의 장기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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