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시인의 시간 (8)

눈(雪)의 시간
뉴스일자: 2013년01월19일 03시00분

김 수영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1966.1.29>     

눈은 시간을 응결시킨다. 눈이 내리는 속도만큼, 응결된 시간은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사물들은 단순해지고 빛깔들의 위계도 사라지면서 우리가 순수라고 부르는 그 시간들이 온다. 그러나 그 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유리창이 있는 따뜻한 내부가 필요하다. 사유는 내부로 물러나 있을 때 말랑말랑해진다. 

시인의 책상 위로 열린 유리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한참을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물질화되고 있는 시간들이 소리도 없이 쌓이고 있다. 그 무엇인가로 응결되고 싶은 방안의 보이지 않는 물방울들도 유리창에 들러붙어 희뿌옇게 시간들을 표상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 뒤에도 유리창 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시인은 지금 ‘폐허’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허물어진 과거의 폐허가 아니라 세워지고 있는 미래의 폐허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사실 과거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래로 퍼올려 진 현재의 운동일 따름. 그 폐허의 기록들을 따라가는 생각의 이랑마다 눈이 내리고, 실제의 그 폐허에도 눈이 내리고 있는지 시인은 생각한다.  

시인은 그 풍경을 시로 옮기고 있다. 눈이 오고, 또 오고, 많은 생각의 두께 위에도 오고, 다시 온다. 그 눈은 새로움에도, 읽어 내려가는 책 위에도, 삶이란 폐허에도, 역사의 폐허에도 내릴까? ‘또 내린다/ 또 내린다/ 또 내린다/ 또 내릴까/ 또 내릴까/ 내릴까’, 단조로운 눈이 속도감을 가진다. 반반으로 나뉜 형식성에 변화를 주기 위해 3번째의 ‘내린다’와 4번째의 내릴까를 바꾼다. 그러나 천천히 떨어지는 눈과 눈 사이에 빈 공간을 주기 위해 행과 행 사이를 비워낸다. 그렇게, 시가 완성되었다.

10년 전 시인은 같은 제목의 시를 썼다. <(중략)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인에게 눈은 순수이고 그 순수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이제 눈은 들여다보는 대상이 아니라 내리는, 운동하는 주체이다. 시는, 사유는, 운동하는 바의 것이다.    

눈은 시간을 응결시킨다. 눈은 세상을 단순하게 그리고 핵심적으로 응결시킨다. 그러나 그 눈이 녹으면 세상은 질퍽해지고 폐허로서 드러난다. 그곳은 시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이다. 시는 응결의 영역이고 직관적 사유의 영역이다. 시의 영역은 여기까지이다. 그것을 넘어서려면 시인이었던 것을 잊어야 한다. 그곳은 시인이 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해방 혹은 봉기의 영역이지 (구조적) 변혁의 영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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