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 지우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 지성사. 1998)
시인은 처음부터 너스레를 떨고 있다. 성인이 된 딸을 이제 마음 놓고 안아줄 수 없다고 ‘생이 끔찍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끔찍한 순간이 아니라 부모들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그는 이미 다른 곳, ‘바깥’에 있다. 그 바깥에서 그는 이미 끔찍한 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기민’들의 고통과 따뜻한 마음의 가족들이 겹쳐진다.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 그는 이미 ‘바깥’을 거닐고 있다.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한 시인은 자괴감으로 타인들을 피하고 옷걸이의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다. 뚱뚱한 자신이 그저 ‘가죽부대’ 같아 언제나 어색하다. 그 어색함은 하이데거처럼 말하자면 불안을 통해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의 낯 섬이다.
하지만 존재가 드러나는 낯 섬은 초월자를 만나는 환희의 순간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로부터 이탈되는 또 다른 불안과 슬픔의 순간이기도 하다. 대중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안과 슬픔을 딛고 일어서라고, 일어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의지 중심 주의적이다. 다음 시 구절들이 그 ‘바깥’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면서 ‘변증법적 초월’로 결론을 맺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랄 수 있고 바라야 하는 생이지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생이 아니다. 시인은 어떤 시간을 상상하는가?
시인은 차라리 슬픔을 ‘상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상스럽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막되고 천하거나 점잖지 못하다’는 뜻이다. 시인은 슬픔 혹은 비애(悲哀)를 부정하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감성이 우리가 의지적으로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조차도 시인은 부정한다. 그리하여 슬픔을 매개로 한 두 개의 길, 초월의 길과 ‘막돼먹은’ 길 모두는 부정된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시간과 태도가 남아 있는가?
시인은 늙어 허름한 술집에 홀로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심히 흘려들으며 조금씩 줄어드는 술잔을 바라보는 자신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 광경은 이상적인 미래로 묘사된 것이 아니다. 그 늙은 시인은 이름 그대로 ‘폐인(廢人)’이라고 표현된다. 폐인이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름다운’이 지시하는 것은 폐인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비극적’ 세계관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철학자 알튀세르를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어진 역사적 정세 속에서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할 때 그것이 혁명이다. (승리하든 못하든 간에)...결국 알튀세르가 그의 이데올로기관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러한 정치관은...단순히 극적(dramatic)일 뿐 아니라 비극적(tragic)이라는 사실을 승인하자...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ic)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활동들이 언제나 우리가 의지한 데로 가리라고 믿을 수 없다. 미래는 어쩌면 우리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곳으로, 더 나빠지는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나의 노력과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의 삶은 더 망가질 수도 있다. 우리가 원했던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그저 800-900억 번째 호모 사피엔스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활동하고, 싸우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어떤 종말 목적론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승리하든 못하든 간에’, 설령 패배하더라도 담담히 삶의 길을 가는, 그리하여 늙어서는 홀로 쓸쓸히 낡은 술집에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 ‘폐인’을 우리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자꾸만 ‘그 무언가’를 바라면서, ‘그 무언가’이기 원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지금 ‘흐린 주점’으로 가 혼자 막걸리 한잔해야겠다. 한데 나도 과연 미래의 그 폐인을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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