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민에 두 주에 한 번 꼴로 '백목사의 예수읽기'를 연재하게 되었다. 예수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허락해 준 뉴스민에 감사드린다.
참 희한하다. 어째서 이즈음에 이런 청탁을 받았을까? 글이 실효성이 있으려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과 매체공간이 잘 어우러져야 할 터이고, 쓰는 사람도 글을 쓸 역량이 있어야 하고, 읽는 사람도 필자의 글을 대면하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글을 실을 매체공간이 있어야 글의 존재이유인 선전이 가능한 것인데, 이 세 가지가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진 느낌이다.
페북에서 고백한 것처럼, 청년 때 근본주의교회와 사상결별을 한 이후, 대안기독교, 대안교회의 내용을 찾는 쪽으로 쭉 살아왔다고 했지만, 그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십수 년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목사가 된 이후다. 특히 대구에 내려와서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다. 매 주 설교를 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야 했고, 이 때부터 근본주의신학이 보지 못하는, 그동안 가졌던 의문들을 의식하며 하나씩 내용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책상물림만 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거리집회와 투쟁현장에서 겪은 경험들이 신학이론과 문제의식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윤곽이 잡힐 때 쯤 해서 이런 자리가 생긴 것이다. 이 시기가 일찍 왔어도 나는 준비가 안 돼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희한하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고백하자면 이런 경우를 때가 됐다고 말하든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앞으로 '백목사의 예수읽기'에서 말하는 것은 매 주일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말씀을 이곳 독자들 눈높이에 맞춰서 각색하여 실으려고 한다. 세상에는 달력이 있듯이 교회에는 교회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여 일 년 단위로 절기를 지킨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림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다시 대림절 순으로 일 년이 순환한다. 6월 24일 주일같은 경우 '오순절 후 네 번째 주일'이다. 교회력에는 주일예배 때 상고할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시편, 구약말씀, 신약서신서, 복음서 말씀 이렇게 네 가지가 한 묶음으로 있다. 나는 이중에서 5년 내내 복음서 말씀만 가지고 주일설교를 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기록한 복음말씀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교회력 이야기가 매우 생소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이 알고 있거나, 다녔었거나,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는 하지 않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근본주의 교회들은 교회력을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NCCK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주로 교회력을 쓴다. NCCK 교단은 예장통합, 감리교, 기독교장로회(기장), 구세군, 대한성공회, 복음교회, 한국정교회, 한국루터회,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있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이렇게 9개 교단이다. (말하다보니까 한국기독교를 소개하는 꼴이 됐는데, 이것도 중요한 현실이니까 기회가 되면 간간히 기술하겠다.)
NCCK에 필적하는 또 다른 교단단체가 기독교를 한국사회에 나쁜 종교로 알리는 데, 한 역할하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다.(한기총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근본주의교회들은 대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속해 있으므로 교회력 존재조차도 모른다. NCCK 교회도 다 교회력을 쓰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교회력을 의식하는 목회자가 있든지, 교회력 전통이 있는 교단에서만 쓴다. 그렇게 따지면 몇 교회 안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점도 분간을 위한 중요한 잣대가 된다. 즉 어떤 교단이 교회력을 사용한다면, 또는 어떤 목사가 교회력 성경말씀을 설교본문으로 한다면, 자기 취향대로 설교본문을 정하는 근본주의교회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인을 망라하여 일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70년 유대전쟁이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60년도 더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분단이데올로기 마그마를 분출하는 현실임을 볼 때, 70년 유대전쟁은 당대 유대인들에게 뼈속깊이 영향을 미쳤다. 66년에 유대인이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여 일으킨 독립전쟁은 73년 마사다의 최후옥쇄로 끝을 맺는데, 이 기간동안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성을 초토화시켰고, 저항하는 사람뿐 아니라 닥치는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는 민족은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로 유다는 철저히 유린당했고, 모든 유다인들은 이 전쟁의 상흔이 민족사와 개인사 불문하고, 크고, 깊게, 오래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은 복음서 저자들에게도 깊은 작용을 하였고, 유대전쟁 직후에 쓰인 마가복음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복음서는 이야기마다 그 배경에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의 지배체제를 풍자하고, 제국의 자리에 예수가 지배하는 하나님나라를 대체한 흔적이 넘쳐난다. 패러디는 원본에 대한 야유이고 풍자이다. 흉내를 내서 원본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진짜 모습을 증언하기도 한다. 페북에 올린 <대안교회 예수상 1>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의 원천인 복음이라는 말조차 기원은 황제의 언어였던 것을 기독교가 패러디해서 황제의 복음을 무력화시키고, 진짜 예수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 생생한 예다. '백목사의 예수읽기'는 이 부분에 많은 주안점을 둘 것이다.
연재는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련다. 예수이야기가 실린 복음서 본문(텍스트)을 소개하고, 그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설명하고, 그 본문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쓰겠다. 같은 목사로서 다른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본문해석까지는 무난한 데 항상 이 현실적용에서 삑사리를 내는 것을 무수히 봐왔다. 이는 설교자 또는 해석자의 철학, 정치적 성향, 인생관, 현실을 보는 눈 등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해석자도 시대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삑사리를 낼 수 있다. 보는 시각이 다르면 그것이 남이 보기에는 삑사리가 되는 것이다. 천상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우리가 수 천 년 전 기록을 읽는 이유는 결국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도 그 기록이 하나님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한 사람의 인생을 초월, 능가하는 권세와 힘이 있다. 혹자는 하나님말씀이므로 기독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가 할 지 모르겠는데, 알다시피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인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만민에게 공평하신 분이다. 모든 이에게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이곳 독자들께도 똑같이 위로와 힘을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럼 다음 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조명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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