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
맑스는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 수 없고, 물질적인 것은 오로지 물질로만 훼손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그림도 총칼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총칼보다 음악이나 미술이 더 직접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밥과 옷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듯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보 불가능하다. 왜냐면 세상에는 예술이 없는 민족, 예술이 없는 시대, 예술이 없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개한 원시민족이라도 자신의 문화와 예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인간과 예술은 분명히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모든 시대, 지배계급은 그들의 문화와 그에 따르는 자신들의 예술을 창조해 왔다. 고대 노예제사회든 봉건제든. 자본주의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각 시대의 고유의 문화는 통치와 지배의 논리에 기여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와 그 문화의 지배 아래에 살고 있다. 시장에 내다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예술과 문화를 벗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돈으로 그 가치를 따져 음악과 미술이 거래되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은 음악과 미술, 연극, 영화, 건축은 설 자리가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조차 없다. 대부분의 공연은 흥행에 맞춰 준비되고 관람객을 맞는다. 미술 역시 돈이 되는 유명화가들의 그림만 찾게 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공연과 전시회가 개최되는 것조차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로 공연과 전시회는 양적인 측면에서 부족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먹고 살기 바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공연과 전시회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기껏해야 텔레비전을 통해 음악과 미술, 예술을 접하면서 그나마도 거기에 적응되어 불편함보다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텔레비전이 공연과 전시회를 대신하지만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그 예술은 철저히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제작 방영되는 자본의 생산물이다.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관철되는 문화예술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물질적 빈곤에 따른 소외감과 박탈감을 안겨준다.
노동정치, 투쟁문화
모든 것이 정치와 경제에 집중되어 있는 세상이다. 지명도가 낮은 사람이 정치를 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이 돈이 되지 않은 문화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정치와 경제가 잘 굴러가고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여전히 오직 선거이고 주식 타령이다.
양식은 계급이라는 말이 있다. 예술뿐 아니라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고유한 정치문화가 필요하듯이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 민중의 문화적 성격과 양식은 격렬한 투쟁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보다 기존의 것을 부수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생존의 절박한 요구로부터 나타나는 투쟁을 받아 안아야 하고 이러한 투쟁의 문화는 긴장되고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대해 관용을 보여야 한다. 즉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를 끝장내어야만 자신의 처지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노동자 민중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을 떠올리면 김대중 전대통령과 해태 타이거즈가 생각나고, <부산 갈매기>를 들으면 롯데 자이언츠가 생각난다. 노래는 혼자 부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부를 때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여럿이 부르는 노래는 사람을 일체화시켜주고 한 곳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방향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포의 애국가'라고도 하는 <목포의 눈물>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이 되게 하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하략-
이 노래는 설명이 필요 없는 민중노래의 대표 곡이다, 1981년 광주에서 만들어져 전국으로 퍼졌고 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게 확산된 노래이다. 백기완 선생님의 ‘묏 비나리’라는 시를 바탕으로 쓰여진 <님을 위한 행진곡>은 적어도 민중진영에서는 애국가 만큼 높은 지위에 있는 노래이다.
묏 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백기완-
-상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하략-
<목포의 눈물>을 <님을 위한 행진곡>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노래의 힘을 이야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동가요 몇 곡 정도는 알고 따라 부를 수 있다. 특히 파업에는 투쟁의 노래나 노동가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면 노동가요를 부를 일이 없어진다.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나서 찾아가는 가요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소위 말하는 뽕짝이다. 간혹 운동가요를 부르기도 하지만 잠시 뿐이다. 유행가는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쯤 되면 투쟁 따로 생활 따로인 셈이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습관처럼 마주하는 텔레비전, 모처럼 쉬는 날 가족들과 찾아가는 공원, 그 어디에도 노동자의 문화, 민중의 문화는 없다. 문화는 연속성을 기본으로 한다. 말하자면 푹 빠지듯 젖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과 놀이와 생활이 따로따로인 환경에서 건강한 노동자,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노동자의 상을 기대하리란 어렵다. 힘든 노동 후 쉬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쉴 때 무엇을 하고, 놀 때 어떻게 노는가도 중요하다. 적어도 자신의 처지에 걸맞게 쉴 필요가 있어야 하고 쉬는 날이 일하는 날보다 더 힘들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노동자 · 민중은 자신을 대표할 일상의 문화를 가져야만 한다. 자본주의 상업문화에 물든 사회일수록 자본을 벗어나기 위한 반자본의 문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같이, 문화예술의 발전은 각 시대가 가진 생명력과 그 중요성을 재는 최고의 시험대라고 한다. 이 말이 옳다면 과연 오늘날 노동자 민중의 문화예술은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파업용, 집회용으로만 부른다면 노동자 민중의 앞날은 어둡고도 멀게만 느껴지지 않을까? 투쟁 따로 생활 따로의 방식이 변화되지 않고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 민중의 문화예술은 더 많이 만들어지고 향유되어야 하고 널리 퍼져야 한다. <목포의 눈물>같은 대중적 힘을 드러내는 우리들의 노래를 파업 현장에서도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불러야 한다.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로 시끌벅적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진보의 씨앗마저 썩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진보는 물론 좌파진영에까지 불똥이 튈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째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칭 진보라고 하는 정당에서 보여준 최근의 정치행태는 보수정당과 조금도 다를 바 없기에 많은 사람이 공분하고 있다. 정치문화도 문화예술과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한 혼란은 자신의 고유한 정치문화를 생성발전 시키기보다 오직 ‘권력’을 잡으면 된다는, 그래서 보수의 ‘정치문화‘조차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정치풍토에서 온 것이 아닌지 반문해 본다.
정치권력을 잡는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설상 선거를 통해 집권을 하더라도 노동자와 서민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일상에서 함께하는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맑스는 ‘관념이 군중을 장악하게 되면 이 관념은 곧 물질적인 힘으로 변하여 역사의 동력이 된다.’고 했다. 앞서 소개한 두 개의 노래는 문화예술의 그릇에 희망이라는 관념이 넘치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