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나는 그에게 추모편지를 썼다. 일면식 하나 없었던 그에게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돌이켜 보건데,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적인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낭만적 연민’이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 정권의 수장을 자살로 내몬 현 정권의 정치보복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분노’의 발현이었다. 이는 당시 ‘노란색’의 추모열풍으로 사회적으로 재현되었다.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시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 곳’으로 정치적 혹은 인간적인 ‘연대’를 희망했고, 실천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희망한 한 정치인의 죽음이 있기 하루 전, ‘사람’이 되고자 공장을 점거한 평택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전 대통령의 추모열기 속에서 시민들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어쩌면 스물 두 명의 죽음행렬은 이때부터 예고된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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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사진출처 : 참세상] | | |
2012년 5월, 나는 검은 빛의 얼굴만이 허락된 영정사진 앞에서 22명의 죽음을 추모했다. 한 것이라고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죽음행렬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라는 후안무치한 변명 앞에 2646명의 삶이 일순간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죽음의 행렬은 이제 22명에 이르렀다. 공장에서 함께 웃고, 노동하고, 저항했던 동료와 가족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3년 전, 외로운 그들만의 싸움의 연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오래된 동맹 앞에서 정리해고라는 살인적 무기에 상처 입은 아픔이 온전히 그들만의 것인가. 요컨대 신자유주의의 칼날 속에 자행되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란 ‘합리적 살인’의 표적은 우리 모두를 향한다.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재능교육, 전북고속 등의 ‘징후적’ 저항이 이를 반증하고, 우리의 원인모를 일상적 불안이 증명한다. 시대가 자행하는 무자비한 학살 앞에서 도덕적이고 낭만적인 눈물만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는 이유다.
2012년 5월 19일 서울역에서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서울광장에서는 ‘노 전 대통령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광장을 사이에 두고 ‘노무현의 가면’과 ‘스물 두개의 관’이 서글프게 마주쳤다.
노 전 대통령이 지향했다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의 말대로 “신명나는 세상”을 희망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그가 꿈꾼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그의 3주기 추모제에 모였을 것이다. 적어도 한 도덕적인 정치가의 죽음에 낭만적인 애도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면, ‘노무현’이란 정치 상품화가 아니라면 3주기 추모물결은 서울광장이 아닌 대한문 앞 분향소에 넘실거려야 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 가장 아픈 그 곳, 시대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벌어지는 바로 그 곳에서 눈물이 아닌, 저항의 목소리를 함께 외쳐야함이 자명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 한 정치가의 도덕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삶의 인식과 실천, 그리고 연대가 필요했다.
3년 전 외딴 섬에 고립되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쓸쓸한 싸움을 반복할 수 없다. 우리의 눈과 귀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향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가장 아픈 ‘그 곳’을 향해 그리고 ‘우릴’ 향해 16세의 봉제공 ‘엠마리스’는 외치고 있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