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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05월21일 10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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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민주주의의 가능성, 일단... “닥치”라고?

전근배(편집위원,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jinglebell@paran.com

콜로세움은 그 어느 때 보다 관중들로 가득 찼다. 얼마 전 새로워 보이는 선수의 등장에 부쩍 재미있어진 경기는 사람들의 환심을 살만 했다. 관중들은 신입 주인공이 영화「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막시무스라도 되어주길 바란 것 같았다.(잘 아시겠지만 영화에서 막시무스는 전 황제의 총애와 덕망을 샀던 엄친아 장군으로 차기 황제를 찜하고 있었으나, 이를 알아차린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뒤 가족을 몰살하자, 빡쳐서 노예로 신분을 숨기고 복수를 위해 검투사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막시무스’의 행동이 영 신통찮다. 막상 경기장에 나오더니 시작도 전에 두통, 치통, 복통을 호소한다. 한순간 코미디언이 되어버렸다. 매번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막시무스의 모습은 단연 최고의 가십으로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국민들에게 그 이름을 대대적으로 알렸지만, 애석하게도 오명이다.

▲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

관중들은 경기에 나온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맹수의 싸움을 보며 환호하고 때론 욕한다. 시민권자인 관중들은 당당하게 콜로세움으로 입장할 수 있었고, 경기 중간이면 주최 측이 무료로 배급하는 빵도 먹을 수 있었다. 적어도 하나, 운이 좋은 날은 두서너 개를 얻어갔다. 그건 주최 측이 준비한 일종의 ‘무상급식’이었던 셈이다. 입장권은 연일 매진을 이어가고 있고,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했다.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최 측은 이를 두고 ‘참여정치’라 불렀고, 관중들은 ‘생활정치’라 노래했다. 이제 콜로세움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장이 되었으며, 입장과 관람, 환호와 욕설은 시민권자로서의 당당한 권리로 대표되었다.

민주주의의 가능성? 일단 ‘닥쳐라’

통합진보당(통진당) 당권파가 저지르고 있는 전횡에 사람들은 경악하고 있다. 혹자는 ‘믿었던 너마저’라며 배신감을 토로하고, 혹자는 진보세력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에 억울함을 느낀다. 하지만 통진당 사태를 한 정파에 의한 단순한 일탈로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무언가가 남는다.

사실 이명박정권은 없는 사람들을 지독하게 못 살게도 굴었지만, 그만큼 진보진영의 잠재적 도약 가능성을 넓히기도 했다. 묵묵히 현장을 지켰던 많은 이들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시대적 조건이 이들의 확장을 추동했던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와 주체의 가능성은 순간순간 보이는 듯 했다. 주지하듯 ‘촛불’로 대표되는 2008년은 그러한 가능성이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던 시기다. 그 시작은 ‘조직되지 않은’ 청소년 학생이었다. 한 고등학생이 제안한 이명박 탄핵 인터넷 서명은 단 29일만에 100만명을 돌파했고, 5월 2일 1만여명으로 시작된 서울 청계광장에서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는 참여자는 한 달만에 100만여명에 육박하게 되었다(2008년 6월 10일, 6월항쟁 21주년 촛불문화제는 전 세계 6번째, 국내 21년 만에 100만명 시위로 꼽힌다).

사회 각계의 시국선언이 뒤따랐고, 보수언론, 대운하, 민영화 문제로까지 의제가 자연스럽게 확장되었으며, 대학생들의 동맹휴업과 화물연대 등 노동자 파업도 벌어졌다. 트위터라는 새로운 소통채널과 방식을 통해 본적도 없는 타인에게 김밥이 필요하다면 김밥이, 물이 필요하다면 물이 전달되었고, 인터넷으로 현장이 생생하게 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 ‘진보’를 자임해오던 많은 주류들의 모습(계획되지 않고 틀도 없는 집회문화, ‘대중’들의 경박함과 가벼움에 치를 떠는가 하면, 깔때기를 들이대며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지도를 ‘해주려 했다’. 그도 아니면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고, ‘진정성’을 의심하고 사건을 해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은 시민들로 하여금 모종의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애초 모두가 주최자였던 집회는 어느 순간부터 ‘주최자’와 ‘참석자’로 구분되었고, 하고 싶은 말 좀 하자고 시작했던 자유발언은 사회자가 시간을 내어 주는 한 코너로 전락했다. 물론 이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진보 주류가 지닌 ‘민주주의’적 운동에 대한 이해와 당시 촛불로 표상되는 새로운 주체들의 이해양식이 분명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또한 촛불이 보수에 의해 범죄자나 폭도로 낙인찍혔다면, 진보에 의해서는 대상화되고, ‘어린아이’마냥 취급되었다 점이다.

이후 당시 촛불집회의 주요 참가자였던 10대와 20대는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 “사람은 꽃이다”라며 이어진 많은 투쟁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등록금 폭탄, 88만원 세대, 삼포세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절망적인 꼬리표는 이들의 고민과 행동들을 더욱 촉진했다. 형식적으로 나마 정책의 우선순위로 청년문제가 꼽히고 있는 점은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역동성은 다시 한 번 ‘진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재단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사건을 통해 새삼스럽게 나타난 이명박정권과의 명암 대비효과에 기대어 야권 정당은 기존의 가치를 접거나 희석시키면서 ‘닥치고 통합’을 추진하였고, 팟캐스트 나꼼수는 연일 ‘닥치고 정치’, ‘쫄지마 씨바’를 연발하며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을 기어이 관중석으로 세련되게 밀어냈다.

작금의 통진당 사태는 위의 맥락들에서 읽혀져야 한다. 구속자 성욕이 감퇴되니 수영복 사진을 보내라 한 것을 ‘표현의 자유’로 이야기하는 나꼼수와 부정․부실선거에 대한 진상조사와 조치를 ‘당원 명예훼손’이라 주장하는 당권파의 민주주의는 묘하게 닮아있다. 테러 대처방안으로 범죄자를 풀어 미국 여성을 성폭행하자던 나꼼수 김용민씨와 성폭력 가해자 논란에 있던 정진후씨를 번듯이 국회의원으로 내세운 통합진보당의 모습 역시 그러하다. 이를 비판하는 이들을 두고 ‘조중동프레임’이라 하는 것도, ‘국공합작’이라 하는 것도 빼다 박은 꼴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미 정권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명박정권 시기에 발현되었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기조직화과정과 투쟁의 전개는 이제 ‘닥쳐라’는 ‘민주주의적 지시’에 입 다물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주장한다면, 시민들의 투쟁과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려했던 이들은 누구였는지, 실질적인 주최자를 ‘배후에 의한’ 참석자로 끌어다 앉힌 이들은 누구였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 의미와 개념부터 다시 정의해 나가야 할 때

▲ 광주 망월동 구묘역.

5.18민중항쟁(5.18민주화항쟁)이 32번째를 맞았다. 이제 노무현 시대의 민주주의는 그가 마지막으로 홈페이지에 남겼던 말처럼 “버려야 한다”. 나꼼수식, 통진당식의 민주주의도 이제 버려야 한다. 비록 통진당 당권파의 극단적인 행태들로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크건 작건 실재하는 진보세력 내의 패권주의적 문화를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시기라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 이야기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democracy)의 주체에서 부터 의미까지 다시 생각하고 싶다. 민주주의가 절차 혹은 대리로 국한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궁극적 목표가 어원인 ‘demokratia’(데모크라티아, demo시민, 민중 + kratia권력, 지배)라는 말 그대로 ‘민중권력에 의한 민중자치’라면? ‘민주화’가 달성되어야 할 어느 점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민중 스스로 자치권력성을 체득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이자, 사회 전체의 민중자치성이 높아지는 역사적 경향을 뜻하는 것이라면?

민주화운동을 ‘통치받는 자들의 권리 회복’이 아니라 ‘민중자치를 향한 투쟁’으로 바라본다면 5.18민중항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은, 또 그를 알리기 위해 죽어가야 했던 이들은 역사 속에서 수동적으로 짓눌린 ‘희생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적극적인 ‘창조자’가 아니었을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주시민들이 점유하고 자치적으로 운영했었던 해방공동체는 그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파편으로나마 증명했었던 장이 아니었을까?

질문하고 싶다. 콜로세움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시금 질문하고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싶다. 이 엄중한 시간, 잔인한 시점은 어떤 형태로든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망월동에 잠든 창조자들이 꿈꾸었던 세상마저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전근배(편집위원,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jinglebell@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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