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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5년05월26일 10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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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나키즘의 현대적 가치와 의미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6-①)

채형복(경북대법전원 교수) europia@knu.ac.kr

장 프레포지에는 역저(力著)『아나키즘의 역사』를 마무리하면서 다분히 격정적이고, 웅변적인 목소리로 아나키즘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절대자유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의 순간에 전방에 선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아나키스트는 대체 불가능한 역사의 근원처럼 항상 타인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들은 씨앗을 뿌리되 수확을 거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꿈꾸는 자유, 투쟁으로 얻으려는 자유는 영원히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맴돌 것이다.” (장 프레포지에, 466쪽.)

프레포지에의 말처럼 인간이 꿈꾸는 자유와 투쟁으로 얻으려는 자유는 현실 세계가 아닌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이 제 아무리 ‘국가 없는 사회’와 ‘국가 대체적인 사회’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국가와 정치 없는 사회’란 오히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결국 ‘국가와 정치는 남는다.’는 사실(혹은 진리!)이 아닐까.

프루동과 바쿠닌과 같은 초창기의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정치권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에 두었다. 오늘날에도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이 본질적 가치와 이념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가와 정치권력을 부정한다고 하여 사회적 동물인 인간세계에서 과연 국가와 정치는 사라질 것인가? 또한 국가와 정치가 사라진 상태에서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개인의 절대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나키즘이 거쳐 온 역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단적으로 답하건대, “아니오!”, 아니 “불가능하다!” 오히려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이 현대사회에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실천적 대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는 아나키스트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다.”(하승우, 44쪽.)

포르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아나키스트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사회조직으로서 ‘국가 자체’라기보다는 ‘국가에 존재하는 권위주의’다. 만일 국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에 의거하여 설립되고, 또 그에 의해 마련된 법제도가 적용되고 있다면, 그 국가는 필연적으로 아나키즘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절대자유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권위적 국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국가 혹은 사회의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아나키스트다.

오늘날의 국내외 상황을 돌아보면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다기한 사회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가 큰 만큼 권위에 기반한 국가통제는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초 구소연방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전개된 세계화와 더불어 한층 가속되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의 등장은 국내외사회의 구조와 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터넷은 국가 간 물리적 국경 철폐,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 보장 및 정보의 신속한 확산과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반면, 거대자본과 국가에 의한 정보의 독점으로 오히려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사생활이 침해되는 등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운동 형태로서 ‘아나키즘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안상헌, “아니키즘 르네상스”, in: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274쪽).

20세기 후반까지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운동에 밀려 잠시 퇴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21세기 초반에 들어선 현재 아나키즘은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나키즘이 가지는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반대

세기의 대전환점인 2000년을 전후하여 아나키즘운동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99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는 WTO 각료회의 개최에 반대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반대하는 대규모시위가 일어났다(‘시애틀전투’). 다른 하나는, 2001년 ‘부자나라들의 잔치’로 불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 일명, ‘다보스포럼’)에 대항하여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이 브라질에서 발족한 것이다. 시장자본주의이념에 충실한 WEF와 달리 WSF는 세계시민사회의 국제연대를 통하여 세계화패권주의에 대항하여(‘반패권적 세계화’: counter-hegemonic globalization) 지속가능한 대안적 미래를 모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시애틀전투는 21세기 아나키즘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래와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범세계적 차원의 연대가 이뤄졌다. 날로 복잡하고 정교해지는 권위주의체제는 오늘날 국가 단위뿐 아니라 국제기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수립되고 행사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절대자유를 향한 개인의 자각과 의식이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집단(혹은 단체)의 연대를 통하여 힘의 결집이 일어날 때 그 영향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세기의 대전환이 이뤄지는 시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다시금 국내적․국제적 연대가 그들이 가진 이상과 상상력, 그리고 자신감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둘째, 아나키즘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운동방식이 있다. 하지만 시애틀전투는 직접행동이 가장 효과적 운동방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얻고 싶은 만큼 많은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아나키즘은 직접 행동, 즉 경제․사회․도덕은 물론 모든 법과 그 제한에 대한 반역․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엠마 골드만의 말에서 아나키사회를 실현하는데 있어 일차적 운동방식은 직접행동임을 알 수 있다(Emma Goldman, Red Emma Speaks, p. 75-76). 최근 아나키즘운동의 경향은 직접행동뿐 아니라 다양한 ‘우회의제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애틀전투에서 보듯이 ‘우회의제방식’과 더불어 직접행동방식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아나키즘운동방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셋째, 세계위계질서라는 측면에서 시애틀전투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내지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났다면, WEF는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상징인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족했다. WTO와 WEF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가 “(세계화 혹은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반면, 세계화반대론자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AWIP).”고 맞서고 있다. '다른 세계‘는 곧 ’대안 세계‘이고, 아나키즘의 이상이 현실적으로 구현된 ’아나키공동체‘를 말한다. 반세계화운동을 통하여 “수직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지배를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공동체의 건설”을 강조해온 아나키즘 운동이념이 세계시민사회운동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안상헌, “아니키즘 르네상스”, in: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276쪽). 

1999년 시애틀전투 이후 WTO 각료회의 개최 저지를 위한 시위는 퀘벡, 프라하, 워싱턴 등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2001년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서는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시위자 한 명이 살해되었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들 속에는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화반대운동(anti-globalization movement)’은 곧 ‘범세계정의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반대운동의 물결은 우리나라에도 밀려왔다. 2003년 9월 11일 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이경해씨는 WTO 제5차 각료회의가 개막된 멕시코 칸쿤에서 WTO를 반대하며 할복 자살하였다. 그리고 2008년 5월에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 내용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대규모 촛불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 참가자들의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특성을 웹 2.0에 빗대어 ‘민주주의 2.0’ 혹은 ‘시위 2.0’의 등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촛불시위에서 일부 시위참가자들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시위는 문화제와 함께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평화적 시위에 대해 경찰은 과도한 강경진압을 하였다. 이 당시 경찰은 컨테이너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여 시위에 대비하였는데, 시위대는 이를 ‘명박산성’이라 불렀다. 이후 ‘명박산성’은 시위를 방지하는 방식으로 번번이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아예 경찰버스를 이용하여 ‘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차벽’은 권위적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개인의 정당한 권리 행사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인식과 대응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 모습. 출처: 참세상

반전과 평화

아나키즘은 본질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다(이를 ‘아나르코-파시피즘: anarcho-pacifism’이라 한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위를 부정하고, 사람의 절대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두는 이념이다. 이 점에서 바라보면, 아나키즘이 평화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모든 형태의 폭력(그것이 정당한 폭력이든 아니든)과 이를 사용한 협박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파괴하는 범죄행위이다. 피터 마샬(Peter Marshall)에 의하면, “아나키스트는 개인의 주권 존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아나키스트들의 가치관이 보여주는 것은 비폭력이고, 반폭력이다.”(Demanding the Impossible, p. 637) 

인류사회에서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전쟁이다. 인류는 20세기 초중반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권위와 정치권력이 결합하여 나타난 강고한 국가주의가 어떤 식으로 인류의 양심을 억압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어떻게 유린하는가를 여실히 경험하였다.

일찍이 영국의 도덕철학자 샤프츠 베리(1671~1713)는『성격론』에서 전쟁의 야만성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가진 ‘덕’과 ‘악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인간의 ‘덕’이 거기에 맞먹는 ‘악덕’ 이상으로 생물학적 가치가 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전쟁은 개인의 생명을 멸망시키는 것이므로 전쟁이 생물학적으로 변호되는 경우는 자기가 사느냐 상대방이 사느냐 하는 최후의 막다른 경우뿐이라는 말이 된다.”(H. 리이드, 91쪽.) 이어서 리이드는 전쟁의 지닌 야만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모든 사물 가운데 가장 야만으로 보이는 전쟁이 가장 영웅적인 정신의 흥분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교제의 매듭이 가장 여물게 맺어지는 것은 전쟁에 있어서이다. 상호부조가 가장 많이 행해지고 위험을 함께하고 공통의 감정이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도 전쟁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영웅주의와 박애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사소한 잘못으로부터 인류의 열애자가 인류의 살육자가 되고, 영웅과 구제자가 압정자와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H. 리이드, 90~91쪽.)

박애는 오늘날 인류애, 동포애, 형제애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영웅주의와 박애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라는 리이드의 말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독일민족’이란 가치를 내세워 히틀러라는 ‘괴물’을 ‘영웅’으로 만든 국가주의의 유령을 본다. ‘대동아공영권’이란 허구의 논리를 앞세워 전쟁을 통한 박애를 실현하려한 일본군국주의도 마찬가지다. 모두 “인류의 열애자가 인류의 살육자”가 되고, “영웅과 구제자가 압정자와 파괴자”가 되고 만 전형적인 사례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아나키스트들이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거부하고 평화주의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운동은 더러 ‘평화적’이지 않다. 이 이율배반적인 가치 충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나키즘은 권위주의적 국가 혹은 국가주의, 특히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거부한다. 국가는 국민(개인)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만일 국가가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아나키즘은 이를 거부하고,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폭력은 불의하고 부정한 것이고, 주권자인 국민(개인)이 가지는 권력을 제한하고,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의 성질과 그 행사의 주체의 차이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에서 규정하듯이 민주국가에 있어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다시 말하여, 주권자는 국민이지 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행사하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의하고, 부정한 국가가 그 권력을 사용하여 주권자인 국민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주권자인 국민은 그러한 국가에 대하여 저항하고 대항하는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주권재민’의 원칙에서 당연히 도출된다. 아나키즘운동이 전쟁을 비롯한 국가폭력을 거부하고, 그에 대한 저항운동을 하는 본질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러시아혁명 때 마흐노주의자로 구성된 군대는 적군과 백군 양자에게, 그리고 스페인혁명 중 아나키시민군은 파시스트에게 강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는 국가폭력에 대해 아나키즘이 어떻게 인식하고, 저항하는 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실제 사례이다.   

▲채형복 교수

<참고문헌>

•H. 리이드(정진업 역), 『시와 아나키즘』, 형설출판사, 1983.
•방영준,『저항과 희망, 아나키즘』, 이학사, 2006.
•안상헌, “아니키즘 르네상스”, in: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도서출판 개신, 2009.
•장 프레포지에(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2003.
•하승우, 『아나키즘』, 책세상, 2008.
•Peter Marshall, Demanding the Impossible: A History Anarchism, PM Press, 2010.
https://libcom.org/files/Marshall%20-%20Demanding%20the%20Impossible%20-%20A%20History%20of%20Anarchism.pdf
 

채형복(경북대법전원 교수) europia@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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