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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5년05월19일 09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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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나키즘의 현대적 운동 방식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5)

채형복(경북대학교법전원 교수) europia@knu.ac.kr

지금 앞에는 책 한권이 놓여있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의 글을 모아놓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Our Word Is Our Weapon)』라는 제목의 책이다. 평소 검은 복면을 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마르코스는,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유학한 인텔리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앞머리에는 마르코스가 쓴 <두 박자로 된 시와 전복적인 결말>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박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 박자

창조한
것은

이었다.

말이
날 형성했고
말이
퍼져나가
날 통제했다.

그의 시는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창조가 이뤄졌다고 쓰고 있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떠올리게 한다. 마르코스는 사이버공간에서 인터넷을 매개로 ‘말을 무기로’ 민주주의, 정의, 자유,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의 글은 유럽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학적 감수성과 기지가 번득이는 명문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마르코스가 사용하는 이 방식은 숀 쉬한이 말한 아나키스트들이 채택한 ‘우회 의제’를 이용한 새로운 운동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동안 정체에 빠져있던 아나키즘운동의 새로운 전기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1990년대 초 독일통일과 구소연방 체제의 와해로 인하여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대 이념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를 대체하여 경제적 이익에 충실한 신자유주의체제가 출범하였다. 구소연방 체제가 붕괴한 국제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기존의 ‘다극체제(multi-polar system)’에서 ‘단극체제(one polar system)’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게다가 인터넷의 발전은 영어를 명실상부한 ’세계공용어‘의 지위로 격상시켰으며, 세계화가 진전되어 국가들 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그 상호의존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반대 운동의 양상을 띠면서 아나키즘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시민단체들의 국제연대와 결속이 강화되었다. ”아나키즘이 현장에 다시 등장했다.“는 토드 메이(Todd May)의 말대로 21세기 ’아나키즘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이다.

1999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국제시민단체들의 연대 시위는 21세기 ‘아나키즘 르네상스’를 이끈 계기가 되었다. 일명 ‘시애틀전투’로 불리는 시위에 이어 2010년 튀니지에서는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재스민 혁명”이 시작되었다. 또한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는 월가 시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의 대규모 시위, 2014년 유럽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연대의 봄” 시위 및 2014년 브라질에서 일어난 월드컵 반대 시위 등이 전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가운데 1999년 ‘시애틀전투’는 21세기에 새로운 전개될 아나키즘 운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쉬 협정> 전문(Preamble)은 “이 협정의 당사자들은, ..., 무역 및 경제활동 분야에서의 상호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개발도상국, 그리고 특히 그 중 최빈개도국이 국제무역의 성장에서 자기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만큼의 몫을 확보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바람과는 달리, 1995년 1월 1일 WTO가 발족한 이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및 최빈개도국 간의 경제적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져 이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간극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시민활동가들은 시애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를 조직하고 운영한 시민활동가들의 모습에 대해 숀 쉬한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5일간의 시위기간 내내 아나키즘의 주요 원칙들이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했고, 아나키스트가 아닌 사람들도 그러한 원칙들을 받아들였다. 그 어떤 중앙집중화한 권위와 위계적 관료제도 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러 상이한 단체들이 거리 행진, 인간 사슬, 현수막 게시, 거리 선전, 가두 연극 등 다양한 행동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의 조율이 이뤄졌다.”(숀 쉬한, 18쪽.)

또한 시위대들은 경찰들의 강제진압에 대해 ‘장난기 섞인 비폭력 전술’(숀 쉬한, 19쪽)을 사용했다. 시위대가 한 맥도널드 가게를 덮쳤을 때 프랑스산 ‘로크포르(roquefort)’(필자 주: 양젖으로 만든 진한 냄새가 나는 치즈) 치즈덩어리를 유리창에 던졌다. 사진 효과를 겨냥한 평화적 항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 후 시위대들의 이런 전술은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온몸에 흰색 천을 뒤집어쓰거나 모의제복 착용’, ‘요정복장을 한 채 깃털로 만든 먼지떨이’(중무장한 경찰들 간질이는데 사용), ‘장난감용 투석기’, ‘치어리더 차림의 외설적 스커트를 입고 방울솔 흔들기’ 등 ‘무기 아닌 무기’를 이용하여 공권력을 조롱하고, 마치 축제를 하듯 시위를 즐겼다(숀 쉬한, 19쪽).

▲시위 '월가를 점령하라'에 참여한 시민의 모습. 출처: flickr.com


반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사용된 이러한 전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혹자는 거대한 국가권력을 대상으로 “고성능 플라스틱 폭탄인 셈텍스(Semtex)가 아닌 물감폭탄, 총이 아닌 물총을 사용하고, 요정차림을 하거나 흰색 옷을 걸치고 시위에 나서는 것, 그리고 솜을 넣어 우스꽝스럽게 부풀린 옷을 입거나 고무로 길쭉하게 만든 팔과 다리는 몸에 붙이고 시위에 나서는 것”은 ‘유약한 히피식 점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숀 쉬한, 32~33쪽). 또한 이러한 특유의 항의방식과 상징적 몸짓이 개별 사회 혹은 국가에 만연하고 있는 심각한 사회와 정치현실을 희화화시켜 오히려 시민연대와 결속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우려와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점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아나키즘에 적합한 운동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절대자유와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은 여전히 사회의 무질서와 무정부상태를 조장하고, 폭력마저 서슴지 않는 테러리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폭력의 사용에 의한 직접행동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혹은 ‘아나키스트=테러리스트’라는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데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직접행동이 필요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상황이 있고, 또 그것이 정치 혹은 사회혁명으로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오늘날에도 거대하고 조직적인 국가 및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연대와 직접행동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몽똘’(필명)은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인가?>라는 칼럼에서 직접행동이 가지는 효용성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직접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는가? 행동하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이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이미 세상은 좋든 싫든 어떤 방향으로건 움직이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굴러가듯이 변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내가 원하고 뜻하는 바대로 세상이 움직이면 좋겠지만 그건 이 세계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겹치고 부딪치며 결정되기 마련이다.” (http://anar.tistory.com/entry/아나키즘은-무정부주의인가)

그의 항변대로 경찰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를 막기 위해 차벽을 설치하거나 최루액(캡사이신)물대포를 사용하여 과잉진압 논란을 빚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이 시민들을 다루는 방법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라즈미그 크세이양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15년 5월호 한글판)에서 주장하는 “민중투쟁 약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항변은 적확하다.

흔히 민주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보통선거가 주권자인 시민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 하지만 바쿠닌에 의하면, “보통선거는 술책이요, 미끼요, 안전판”이고, “인민의 의지라는 이름과 구실 하에 인민을 억압하고 몰락시키는 교묘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방영준, 78쪽). 불의하고 부정한 권위와 권력에 직접행동의 하나로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고유한 권리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필요할 때는 거칠고 강하게 부딪히고 싸워야 한다. 다만, 이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국가권력이 사용하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고 대항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인가? 언제까지 맞설 것인가? 또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직접행동과 함께, 또는 그와는 달리 국가 중심의 통치(혹은 지배)권력과 자본주의에 맞서는-우회하는- 아나키즘에 부합하는 새로운 운동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 방식의 하나로 ‘우회를 통한 문화예술운동’을 제안하고자 한다.

기 드보르(Guy Debord)에 의하면, ‘우회(détournement)’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유괴해 간 스펙터클을 되찾는 방법”이다. 그는 『스텍터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현대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축적물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은 표상으로 물러난다. 스펙터클은 궁극적으로 잠을 자려는 욕망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는 감옥에 갇힌 현대 사회의 악몽이다. 스펙터클은 이 같은 잠의 수호자다.“라며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과 의식 깊숙이 자리한 스펙터클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칼레 라슨 외 지음, 39쪽).

따라서 드보르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돌아가기’를 뜻하는 우회는, 스펙터클로 전락해버린 이미지․환경․분위기․행사 등의 의미를 역전시키거나 전복시키기 위해 방향을 바꾸고, 그 결과 탈환해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1960년대 ‘문화 방해운동(culture jamming)’을 이끌던 상황주의자(Situationist)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우회를 이용하여 만화 등장인물의 말풍선 고치기, 거리의 폭과 빌딩 높이 수정하기, 문과 창문의 색상과 모양 바꿔버리기 등과 같은 소극적 활동은 물론, 특정 종교의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교회에 침투한 후 수천 관중을 향해 “신은 죽었다!”고 엄숙히 선언하는 적극적 활동을 통해 “기존의 사회 체제를 대폭 전환시키는” 문화혁명을 일으키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칼레 라슨 외 지음, 30~31쪽). “우리는 이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에서 보듯이 그들의 목표는 “(정신 폭탄으로) 이 세계에 혁명적인 의식과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칼레 라슨 외 지음, 66쪽). 이 점에서 상황주의자들에 의한 문화운동은 아나키즘과 아주 닮아있다.

디자인과 회화 등 문화예술은 물론 시민정치운동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이러한 ‘우회 의제 운동 방식’은 국제사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 G20 서울정상회의 포스터에 풍자그림을 그려 사회 이슈화되었고(‘쥐20풍자그림사건’),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제작․배포한 혐의를 받고 경찰에 의해 구속․수감된 ‘둥글이 박성수’가 사용한 방법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박성수가 공권력을 대상으로 사용한 운동 방식은 권력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전형적인 ‘우회 의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는 대구수성경찰서의 소환장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하면서 개껌을 넣어 보내기도 하고(‘개껌 보내기’), 경찰서에 출석해서는 수성경찰서 표지석에 개사료를 뿌리며, “권력에 꼬리 흔드는 경찰은 개사료나 먹어라.”고 외치기도 하였다(‘개사료 뿌리기’). 그리고 서울 대검찰청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에 대해 수사를 하는 것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그는 풍자의 의미로 ‘멍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개소리 짖기’).

문화예술운동은 유독 현대 아나키즘에 와서 채용된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19세기에 유럽의 아나키즘이 시작될 무렵부터 문화예술은 아나키즘 운동의 핵심부를 차지해왔다(앨런 앤틀리프, 12쪽). 심지어 프루동은, 프랑스 정부가 1863년 국가공식미술전시회에서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가 그린 회화 <회합에서 돌아오는 길(Le retour de la conférence; Return form the Conference)>의 전시를 거부한 사건이 그의 저서 『예술의 원리에 대하여』(1865)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앨런 앤틀리프, 28쪽).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아나키즘운동에 있어 문화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참된 인식으로 사회의 부당함을 진지하고 대담하게 묘사하는 창작 방식은 가두 연단의 선동가가 보여주는 가장 격렬한 장광설보다 더 큰 위협이자 ... 보다 강력한 영감이 된다.” (앨런 앤틀리프, 13쪽.)

골드만의 이 말은 곧 “혁명의 본체는 텍스트다, 결코 폭력이 아니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사사키 아타루, 100쪽). 사사키는 독일에서 루터에 의한 종교혁명을 그 예로 들면서, ‘텍스트 읽기와 쓰기’가 가지는 혁명적 파괴력에 주목한다.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104쪽.)

결국 ‘아나키즘 르네상스’를 맞은 21세기에서 ‘우회’의 방식으로 아나키즘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바로 ‘텍스트 읽기와 쓰기’다. 다시 말하여,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다(사사키 아타루, 105쪽). 
 
예술가(혹은 문학가)의 창조적 자유는 근본적으로 아나키스트의 사고와 닮아있다. 그들은 “무엇이 용인될 수 있는지를 명령하는 위계 관계나 타인을 억누르는 권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앨런 앤틀리프, 16쪽). 창조 활동은 인간이 가진 사고 활동의 절대자유를 전제로 하여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와 아나키스트는 문화예술과 사회정치운동을 결합하여 지배와 권위에 젖은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창조적 파괴자들’이다.

▲채형복 교수

<참고문헌>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지음(윤길순 옮김),『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해냄, 2002.
•방영준, 『저항과 희망, 아나키즘』, 이학사, 2006.
•사사키 아타루 지음(송태욱 옮김),『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자음과모음, 2010.
•숀 쉬한(조준상 옮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필맥, 2003.
•앨런 앤틀리프 지음(신혜경 옮김), 『아나키와 예술: 파리코뮌에서 베를린장벽의 붕괴까지』, 이학사, 2015.
•칼레 라슨 외 지음(길예경․이웅건 옮김), 『애드버스터: 상업주의에 갇힌 문화를 전복하라』, 현실문화연구, 2004.

 

채형복(경북대학교법전원 교수) europia@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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