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님 사모이신 박용길 장로님 회고 한 토막이다. 한국전쟁이 나서 난리 통에 피난을 갔는데, 어른들의 소통착오로 다섯 살 장남 문호근을 잃어버렸다. 부모 형제들은 넋이 나갔지만 딱 한 가지 기대한 게 있었다. 피난 떠날 때 아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많고 정신이 없어서 우리가 서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절대 당황하지 말고, 엄마 찾는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 자리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부모는 아이를 찾기 위하여 다시 길을 돌이켰는데, 시간이 꽤 흘렀지만, 잃어버렸던 그 장소에 아이가 나무처럼 딱 서 있었다고 한다. 하도 신통해서 "너 무슨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었니?" 했더니, 엄마가 절대 돌아다니지 말고 꼭 붙어 있으라고 해서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비록 어린아이 일지라도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지키면 이렇게 구원을 받는다.
오늘 성경말씀은 포도나무 비유이다. 이스라엘에게 포도나무는 각별하다. 구약에서 포도원이나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말해주는 전형적인 상징어이다. 하나님은 꼭 집어서 이스라엘이 당신의 포도나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이사야 5:7) 그러나 실제 포도나무와 상징 포도나무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 포도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농부의 고생을 싹 씻어주는 보람을 주었다. 하지만 상징 포도나무는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하기는커녕, 실망과 배신만 안겨주었다.
"내가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이사야 5:2)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이사야 5:7)
이처럼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애증이 걸려 있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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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remnantofgiants.wordpress.com | | |
예수는 포도나무에 담긴 전(前) 역사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칭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5절) 예수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칭함으로 불순종과 범죄로 불살라진 이스라엘 포도나무와 당신을 구별하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하나님께 실망만 주던 이스라엘의 포도나무와 달리 이제 당신은 하나님께 농부의 보람을 안겨 드리는 새 포도나무임을 선언한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이 있다. '머무르라'와 '열매를 맺는다'이다. 1-8절 중, '머물러라'는 말씀은 8번 나오고,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7번 나온다. 즉 이 두 단어가 이야기의 중심주제임을 알 수 있다. '머무는 것'과 '열매를 맺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 '머무르라'와 '열매 맺으라'와 같은 비중으로 따라 오는 단어가 또 있다. '안에' 이다. 8번 나온다. 우리는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어떻게 머무를 수 있나?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저 멀리 높은 데, 하늘 위 어딘가에 계신 분으로 알았다. 아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침묵하고 그 분을 지향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데 구태여 소리지르고 구구절절히 말할 필요는 없다. 저 멀리 밖에 계신 분이라면 혹시 못 들을 수 있어서 크게 소리 질러야 할 지 모르지만, 내 안에 계시다면 조용히 그 분의 활동과 현존을 인정하고 그 안에 머무르면 된다.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4절)고 했다.
열매에 관해 두 가지 요점이 있다. 하나는 해당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둘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무턱대고 열매를 맺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시나 엉겅퀴를 내면 안된다. 그리고 과일은 싸다고 좋은 게 아니고 달고 맛있어야 하듯이, 질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요한 15장은 고별담화이다. 즉 예수의 유언장이다.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남겨지는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운동을 이어갈 것인가가 관건인 시점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일은 무엇이겠는가? 예수의 유지를 굳게 깊이 고이 간직하는 것이다. 포도나무 비유로 말하자면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붙어 있을 수 있나?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내가 동일시를 이루어야 한다. 내 삶이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한다. 동일시의 통로는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하면 순종한다. 예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했다. 너희가 순종하면 살고 거역하면 죽으리라는 말씀은 참이다.
자기 자아가 척도가 돼 버린 시대에서 예수산 포도열매인가 여부는 사람이 살고 죽음을 가름하는 매우 귀한 덕목이다. 자기 자아가 척도가 돼 버린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 자아가 거짓자아라는 점이다. 본능적 정서인 안정심리와 인정욕구와 통제욕망이 구축한 행복정서프로그램에 따라 생성된 거짓자아에 휘둘리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이 오도된 질서에서 벗어나서 참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예수께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향뿐이다.
그럴 때라야, 진정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예수가 당신 삶을 바치신대로 사랑의 열매(고전 13장), 의의 열매(빌 1:11), 성령의 열매(갈 5:22)이다. 작금의 기독교회가 놓쳐버린 것이 이 지점이다. 자유경쟁시대를 사느라 교회도 자체생존유지가 급선무가 돼버렸다. 그래서 인권정의평화생명 등 예수열매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생존을 넘어서 번영에 골몰하느라 참 세상 가치들에 대해 별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형편이 됐다. 교회에 각종 이해관계 카르텔이 기생하는 것도 이런 결과이다.
수도 없이 말해서 식상하지만 또 말하건대,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웨의 평등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왕권력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바뀌어버린 율법과 성전을 개혁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야웨께 돌아오고, 토라에 복종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야웨신앙을 계승하여 하나님나라운동을 펴 나갔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지금 예수를 대변한다는 교회꼴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구약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판 예언자들도 똑같이 외쳤다.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래도 의미있는 것은 이런 선한 가치를 계승하는 투쟁이 역사가 되고 참 사람으로 사는 기준을 남겨준 것이다.
이 참에 꼭 상기시킬 말이 있다. 모든 열매들은 혼자 맺을 수 없다. 어떤 열매든 나무라는 모체가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듯이 집단이나 공동체의 결실이다.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적과이다. 다 같은 열매지만 농부가 인정하지 않는 열매는 사정없이 가지치기 당한다. 주로 작고 부실한 열매가 그렇다. 잘라내는 까닭은 더 튼실하고 맛있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이다. 나무라는 공동체는 최적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공동체의 상황과 조건과 수준이 거기에 맞는 열매를 나타내게 돼 있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가 어떤 열매를 나타내느냐는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의 평균수준에 달려 있다. 그 평균수준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는가? 태초에 집단이나 공동체를 만든 원뜻을 되새기면 된다. 그 뜻에 부합하면 잘 가고 있는 것이고, 뜻이 유명무실해지고 되레 종속변수가 주요조건이 돼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회에 대해 말하자면, 교회가 발산하는 열매가 좋으면 예수께 잘 붙어 있는 것이지만, 열매가 부실하거나, 예수나무와 무관한 열매를 맺는다면, 몸통만 남기는 과감한 적과를 하든지, 접붙이기하든지 결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새 종자가 나오고,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므로. 이것은 나무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 이야기임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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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www.winesfromspainusa.com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