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난 5일,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상복을 입고 가족들의 영정을 들었다. 광화문 광장에 주저앉은 한 어머니는 딸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출처: 정현진 지금여기 기자 | | |
2014년 4월 16일.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 사망, 9명 실종(2015년 4월 16일 현재)-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국제법학자로서 나의 사고(思考)는 이 날을 기점으로 멈춰서있다. 이 날 마치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듯이 우리는 침몰하는 세월호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가는 생명들을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국가도, 이웃도, 국민도 없었다. 신에 대한 애끓는 기도도, 그 기도에 응답하는 신도 없었다.
나는 국제법학자다. 입버릇처럼 국제평화와 상호공존을 강조했다. 수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제도장치의 하나로 창출된 주권국가의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고 연구하였다. 그 중심에 법적 주체로서 개인이 있다고. 그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존엄한 존재로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개인이 곧 주권자’라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침몰하는 세월호를 따라 국가도, 개인도, 모두 끝 모를 심해(深海)로 가라앉고 말았다.
“지난 오십 년의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배웠는가?” 자탄하였다. 무능하고,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며 세상에 나서고 거들먹거리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추구하던 지식과 학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생명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자책하고 반성하며, 고민하였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개인을 통하여 국가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사람은 사회체제를 떠나 살 수 없다. 그 체제의 전형이 국가이고 보면, 국가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개인의 행복한 삶도 보장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문적 성과가 도출되었고, 또 법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아나키즘’을 도구로 빌어 양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아나키즘(anarchism)은, “일체의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는 사상”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불리고 있다(네이버사전: ‘아나키즘’). 이 정의에서 보듯이 아나키즘은 ‘일체의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그 속에는 ‘국가체제’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그 이유는? 바로 ‘개인의 자유가 최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절대자유’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나키즘을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최상의 가치인 ‘절대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체제를 부정하고 전복을 꾀하는 불온한 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고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아나키즘을 이렇게 이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잘못 번역하여 사용하고, 그 사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어쩌면 아나키즘은 앞으로도 영원히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아나키즘 사상이 가지는 본질이다. 이 때문일까? 아나키즘은 일반대중에게 여전히 낯설고, 불온하며,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탄압받고, 축출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아니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오늘날까지도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새로운 모습으로 쉼 없이 진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방영준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 부활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나키즘이 그 어느 정치 이념보다 비정치적이기 때문일 것이다.”(방영준,『저항과 희망, 아나키즘』, 이학사, 2006, 6쪽.)
그렇다면 과연 아나키즘은 비정치적인가? 어쩌면 아나키즘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을 현실에 실현하는 수단으로 ‘비정치성’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이념에 있다. 즉, 아나키즘에게 있어 최상의 가치는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절대자유’이다. 아나키즘은 그 외 어떤 가치와 이론, 그리고 체제도 부정한다. 이에 대해 방영준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나키스트는 절대적 교의를 부정한다.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부정한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는 모순을 즐긴다.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모순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순에 의의를 부여한다. 마치 하나의 동전이 두 개의 표면을 가진 하나의 물건이듯 모순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모순의 균형은 아나키즘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제일 큰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사람이 아나키즘의 잔가지 이론만 보다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방영준, 7쪽)
아나키즘이 가지는 ‘모순의 균형’은 ‘자주․자유․자연’(박홍규, 『자주․자유․자연’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년, 324쪽)으로 나타나고, 독단과 권위를 배격하고, 통치와 지배의 부정을 통하여 개인 간의 ‘연대, 생명, 생태, 평화, 연합, 공동체’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사회는 성장해오고 있는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진보하고 항상 재조정되는 사회이다.”라고 피력하였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이상에 근거한 사상이자 ‘하나의 삶의 양식(way of life)’이다. 이를 현대적 의미에서 파악하면,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연적, 자율적, 문화적 삶’을 지향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나키즘이란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사회의 그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인 셈이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말고, 누구도 지배하지 마라.”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아나키즘이 가지는 이 모든 속성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내면의 반란을 부채질 하는 자”라며, “진정한 혁명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내세우지도, 또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도 않지만, 아래의 그의 글은 아나키즘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산 자에게 유일무이한 보물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자립이며 진정한 젊음이다. 하지만 무수한 욕망과 무수한 정념이 그 길을 가로막아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가시밭길이다. 투쟁의 연속이며 숨 돌릴 틈도 없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사는 것의 진정하고도 깊은 맛은 자신이 확신을 갖고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마루야마 겐지(김난주 옮김), 『나는 길들지 않는다』, 바다출판사, 2014, 192쪽.)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표현에서 착안하여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이란 제목으로 앞으로 연속하여 아나키즘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아나키즘에 관한 적지 않은 저작물이 나왔다. 필요한 경우, 나는 기존의 저작물과 성과를 인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내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상의 한 계보로서 아나키즘을 이해하기 위하여 ‘주요 인물들’의 사상과 저작에 대한 분석이다. 멀리는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부터 ‘아나키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루동, 바쿠닌은 물론, 가까이는 이휘영, 신채호까지 동서양의 주요 인물들의 사상을 분석하고 소개할 계획이다.
물론 나는 철학자도, 정치사상가도 아니다. 평소 아나키즘에 대해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나키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일반대중들에게 혼란을 안겨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나키즘에 대해 글을 쓰고자 용기를 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국가가 뭐야? 국가가 어디 있어? 우리가 빨갱이야? 우리도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시민인데...”라는 어느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절규가 가슴을 저며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안산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였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폐지를 주장하며, 그녀는 경찰차 아래 드러누워 온 몸과 눈물로 저항하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연구실에서 그 동영상을 보면서 이 나라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국가주의에 의해 희생된 그들을 위해 학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 중의 하나로 아나키즘에 관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다른 하나는, 아나키즘이란 본래 어떤 틀에 고정되어 있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인간의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진보하고 변용한다. 무엇보다 아나키즘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가치이자 사상이다. ‘무정부주의’로 폄하․왜곡되어 인식되고 있는 아나키즘을 나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현실 속에서 아나키즘을 되살리고 싶다.
연속되는 글을 통해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된 개인과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해 다시 묻고 토론하고자 한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존엄한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의 주체성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국가를 규정하고, 통제하고, 명령하는 ‘주권자‘로서 개인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재인식하고, 그 방향성을 재설정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