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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68)
요한복음 12:20-33 "들려 올라갈 때에"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newsmin@newsmin.co.kr

우리는 사람의 성숙도에 대해 말할 때 '철이 들었다, 안 들었다'고 한다. 철이 들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때를 분별하고 그 때에 맞게 사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때를 잘 알고 또 그 때에 맞게 사신 분이다. 오늘 성경 말씀 끝 절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요한 12:33)에서 보듯이, 예수는 당신에게 닥칠 죽음의 의미까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예수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때를 의식했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모친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의 첫 마디는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답한다.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다급한 상황에도 당신이 나설 때인가, 아닌가를 분간했다.

성전에서 유대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요한 7:30, 8:20) 여기서 말하는 때는 예수가 죽으실 때를 말한다. 이 말씀에서 확인하듯이,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도 전적으로 예수의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결정이다. 지배세력의 힘에 굴복한 것이 아님은 체포 때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로마 군대 병정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닥쳤을 때 예수께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자, "나사렛 사람 예수요" 한다.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하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진다.(요한 18:6) 이 말씀은 예수가 지배자의 폭력에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그들 손에 들어가셨음을 보여준다.

오늘 성경 말씀은 예수가 당신의 운명이 달린 때에 관하여,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신다는 관점이 철저히 담겨 있는 요한공동체의 신앙고백서이다.

이야기는 명절날 이방인인 그리스 사람들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와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 다리역할을 했다. 그리스 사람들의 방문은 예수가 당신의 때를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소식을 받자마자 예수의 첫 반응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했다. 앞에서 자기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분이 이제는 정색하고 때가 왔다고 한다. 무엇이 이런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나? 정작 찾아와야 할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하고, 진리 밖에 있다고 천시한 이방인이 예수를 찾아온 일이다.

예수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때는 항상 이방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 탄생 때는 이방인인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찾아와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로마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고백을 한다.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예수가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계신 때에, 뜻밖에도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수께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민족인 유대사람은 예수를 끝없이 적대하고, 그래서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찾아오는 것은, 예수에게 큰 힘이 됐다.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서, 낙심이나 좌절할 수는 있어도 포기할 수는 없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성과나 열매를 사람수로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있으면 성공이고 없으면 실패로 규정한다. 하지만 예수도 제자 외에 따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가 급식이적을 행하신 후에,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급식이적에 대해 사람들과 긴 논쟁을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급식이적에 맛을 본 대중이 예수를 더 많이 따라야 할텐데 되레 다 떠나버린다. 그런 현실에 낙담한 예수가 열두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처연하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67) 다 떠나버린 뒤끝에 쓸쓸히 홀로 남아서 낙심하고 외롭고 고단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참되고 옳은 말씀을 하면 대중이 호응하고 열렬히 따를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오히려 그 말씀에 부담을 느낀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그렇게 살 자신은 없다" 하면서 슬금슬금 뒤로 빠진다. 오히려 본능적 욕구에 맞춘 행복정서 프로그램으로 사람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람이 대성공을 거둔다. 행복정서프로그램이란 생존/안전, 애정/존중, 힘/통제의 본능적 욕구를 동기의 중심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 중심의 주위로 우리의 사고, 감정, 행동이 끌려 들어간다.(토마스 키팅,『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여기서 거짓자아가 양성된다.

대중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소리를 하면 열렬히 환영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욕망을 거스리는 말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순간에 등을 돌린다. 예수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당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씀이다. 당신이 겪은 냉정하고 가혹한 현실에서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사한 일은 유대인들이 모두 등을 돌린 그 빈 공간을 그리스 사람 소수가 자리를 채운다. 이방인의 방문에 고무된 예수는 당신이 어떻게 영광을 받는가에 대해 주옥같은 말씀을 남긴다.

그 유명한 밀알 이야기가 나온다. 밀알이 썩어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 아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가 4:8)고 한 것처럼, 땅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매우 특별한 일같지만, 한편으론 의외로 평범한 진리이다. 평범하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이다. 진리는 평범하고 보편적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썩은 밀알비유를 말씀하심으로 당신의 죽음을 암시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독특한 말씀이 있다. '들려 올라간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한 3:14)고 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조상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달린(들린) 놋뱀을 보고 구원받은 사건이다.(구약 민수기 21장) 오늘 성경말씀에서도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요한 8:32) 라고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예수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배자의 폭력에 십자가죽임을 당했지만, 결코 지배자 방식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씀도 죽음에 대한 색다른 신앙고백이지만, '들려 올라간다'는 말씀도 그들만의 고백이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인 고뇌가 깊지만, 자기 실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서 자신 역시 '들려 올라간다'(십자가에 달림)고 했다. 당신이 들려 올라가므로, 모든 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어 온다. 영광과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람이 때를 분간한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특히 예수도 시대를 분별하라고 강조했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2,3) 했다. 시대분별은 어떻게 하나? 우리는 의외로 시대분별을 할 때, 높은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요한 12:31)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평등한가? 정의로운가? 생명이 살아나는가? 로 식별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 통치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기 야망을 이루는 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시각, 특별히 통치자를 보는 안목이 남달라야 한다. 통치자에 대한 선망을 거두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특히 권력의 제물이 되어 죽고, 생존권, 인권, 노동권, 행복권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므로 삶의 지향점도 달라져야 한다. 나만 상처 입지 않는, 죽지 않는 밀알이 되려는가? 아니면 죽어서 열매를 많이 맺는 밀알이 되려는가? 죽는 밀알이 되기 위해서 자신에게 임한 때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희생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는 것은 자기 본능 위주로 설계된 행복 프로그램에 비추어 볼 때, 거꾸로 가는 길이지만, 진리를 따르는 길이다. 진리를 찾는 길에는 희생만 있지 않다. 값진 열매가 있다. 영생에 이른다. 그러니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을 승화시키자. 묵묵히 썩는 밀알로 살자.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newsmin@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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