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원 씨(89) 고향은 부산 고리 핵발전소가 들어선 마을 ‘고리’다. 김씨가 살던 고향집은 고리1호기 ‘머리’가 앉은 바로 그 자리. 고리1호기 건설로 1970년 고리에 살던 40여 가구가 울주군 서생면 신리8반 골매마을로 이주했다. 김달원 씨는 골매마을로 이주해 45년을 살았지만 곧 신암마을로 다시 이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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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남매를 키운 김달원(89), 심성옥(88) 부부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 |
2000년 9월 6일 한국수력원자력은 서생면 비학마을과 골매마을에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고시했다. 골매마을은 2000년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주문제로 한수원, 울주군, 울산시와 여러 차례 집단이주를 협의했다. 하지만 서생면 신암마을로 이주지만 정해졌을 뿐 아직 기초공사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다.
김달원 씨를 처음 만난 건 손자가 결혼해 동네잔치가 벌어진 날이다. 예식에 갔던 마을 사람들은 관광버스에서 내려 혼주 집에 모였다. 바닷가 언덕 작은 마을에 노래와 춤사위까지 더해지니 어느 집이 잔칫집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김씨는 자식을 11명 낳아 키웠다. 아들 일곱에 딸 넷을 키웠는데 아들 둘과 딸 둘은 골매마을에 산다.
마을 사람들은 잔칫날이라 마음을 열었다. 그 전에 마을을 몇 번 찾아갔으나 ‘기자는 다 사기꾼’이라며 말을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두 번에 걸친 이주는 마을 내에도 마을 밖을 향해서도 불신을 낳았다.
고리마을에서 골매마을로 첫번째 집단이주
김달원 씨는 1920년대 초 고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농사일과 바다 일을 했다. 1969년 어느날 바다에 나가 일하고 돌아오니 고리마을이 뜯긴다고 했다. 김씨는 “허환이라는 자가 고리 주동자였어. 왜놈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 왜 우리를 내쫓느냐는 말이야”라고 그때를 기억했다. 저항도 했지만 이주지를 물색해야 했다. 마을에 구봉하라는 영감쟁이가 살았는데 마을 최고 유지였다. 구봉하 영감과 마을 사람 몇은 골짜기 냉수가 나오는 곳(냉천마을)으로 이주하려 했지만 그 마을 이장이 안 된다고 해서 포기했다. 두 번째 물색한 이주지는 ‘이동마을’이다. 그 마을에 논을 평당 500원씩 계약금 500만원을 주고 집단이주지로 계약했는데 그 마을도 마음이 바뀌었다. 결국 계약금을 도로 받아들고 찾아낸 마을이 ‘골매마을’이다. 고리에서 40가구가 골매마을에 집단이주했지만 어떤 이는 터만 사놓고 집을 짓지 못했다. 이주보상금을 받아 돈을 쓰다 망가져 가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끝내 골매마을에 집을 못 짓고 흩어졌다. 1970년 당시 고리마을 주민 148세대는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 온정마을로 43세대가 집단이주, 울주군 서생면 신리 골매마을로 40세대가 집단이주했다. 나머지 세대는 기장군 길천, 월내, 신평 등지로 개별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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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군 서생면 신리 골매마을에서 본 신고리 3~4호기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 |
김달원 씨는 어렸을 적 골매마을을 여러번 다녔다. 골매마을 서낭당 아래는 나병환자들이 자주 모여 있었다. 신암에 고모가 살았는데 골매를 넘어 고리로 가면 빨랐지만 둘러가곤 했다. 어린 나이에 ‘나병 환자는 사람 간을 내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 무척 겁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먹을 게 없어 밥을 동냥해다 먹던 모습이었는데 그때는 사람 사는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부인 심성옥 씨 위안부 잡혀갈까 두려워 열일곱에 결혼
젊은 시절 상어잡이와 멸치잡이
김씨는 18살에 부인 심성옥 씨(88)와 결혼했다. 심성옥 씨는 ‘섬뜰’ 사람으로 17살에 시집왔다. 일제강점기던 그 때 일본은 위안부를 한참 모집했고 심씨는 위안부로 잡혀갈까 두려워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심씨 고향 섬뜰은 도야마실이라고도 불렀는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마을이다.
김씨는 상어잡이와 멸치잡이를 주로 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풍선을 타고 당일치기 고기잡이를 했지만 김씨는 ‘발동질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가 상어를 잡았다. 배는 25~30톤급. 아나고를 밑밥으로 하고 낚싯줄은 다섯발 길이다. 큰 상어는 15~20관(56~75kg)을 넘어섰다. 보통 일곱 사람이 같이 일하며 낚싯줄을 끌어올렸다. 먼 바다에 한 번 나갈 때 얼음은 12톤 가량 준비, 보통 5~7일씩 고기를 잡고 배가 다 차야 돌아온다. 상어는 부산어시장이나 울산어판장에 내다 팔았다. 골매마을에 왔을 때 350kg에 이르는 큰 상어를 잡기도 했다. 상어는 기름과 지느러미도 같이 파는데 그게 값이 많이 나간다. 상어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를 수협을 통해 중국 사람들이 주로 사갔다. 상어는 6월에 많이 잡힌다. 멸치는 대변항에서 잡았고 한 번에 보통 300~500상자씩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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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골매마을 전경. 심성옥 씨(88)가운데가 미역을 널고 있다.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 |
원전이 들어선 뒤 발전소에서 나온 온수가 바다로 흘러들었다. 해수 온도가 상승하자 주변에 ‘오만잡것(어류)’이 다 생겼다. 자리돔은 열대성 어류인데 고리와 골매쪽에서도 잡힌다. 반대로 도다리 종은 서너 가지(범도다리, 이시가리 등) 없어졌다. 감성돔 종은 돗돔, 혹돔을 볼 수 없는데 예전에 많이 잡히던 어종이다.
김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대마도까지 돛단배를 타고 가서 큰 배를 끌고 온 기억이 생생하다. 부산사람이 대마도에 큰 배를 사놓고 김씨 일가에게 그배를 가져오라고 했다. 김씨를 포함한 3명이 배를 몰고 오던 중 가져갔던 돛배가 고장나 애를 먹었다. 그때 경험은 먼 바다에 나가는 일도 두렵지 않게 했다. 김씨는 일제시대 때 길천에 있는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거기서 고바야시라는 선생한테 일본어를 배웠다.
옛 주소를 물어보자 김달원 할아버지는 부산시 동래군이었는지 경남 양산군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속한 ‘고리’는 1914년 경남 동래군에 편입,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됐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생면도 행정구역 변화가 있었다. 1914년 일제 행정구역 개편 때 울주군, 1963년 경남 양산군에 편입, 1983년 울주군에 편입해 현재에 이른다. 그만큼 서생면은 부산과 울산 최 경계지점에 선 곳이다.
군에 갔다 제대하니 집에는 전사통지서
김씨가 잊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군생활이다. 김씨가 살던 고리마을에 청년이 12명 있었는데 모두 군에 갔다. 김씨는 덩달아 군 입대를 자원했다. 밀양 삼랑진에서 훈련을 받고 목포까지 행군하다 인민군을 몇 번 만나 싸웠다. 발바닥에 피가 흘러 걷지 못하자 낙오되기로 하고 논바닥에 주저앉았다. 인민군이 와서 총을 쏴 죽여도 죽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랬더니 대대장이 차를 후진해 와서는 김씨를 태워 순경이 주둔한 마을에 내려줬다. 김씨는 뒤늦게 목포에 도착해 보초병으로 있다가 강원도 내금강에서 군생활을 했다. 9연대가 까치봉에 올라 대공표시(깃대 세우는 것)를 하던 중 인민군이 직선포를 터뜨려 3명이 죽었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가 죽고 김씨는 왼쪽 팔을 다쳐 지금도 고생이다. 그는 팔을 다쳐 강릉병원에서 한 달 치료받고 부산으로 왔다. 김씨가 속한 군은 부산진국민학교에 주둔했다. 팔도 다쳤고 돈 2만원만 주면 제대시켜준다는데 2년 넘게 고생하고는 돈 주고 제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김씨는 뒤에 논산에서 운전병으로 있다가 제대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전사통지서가 와 있었다. 동생이 전사통지서를 부모에게 전달 안 하고 외가에만 알리고 있던 터였다. 김씨 동생은 5연대 소속으로 대구공원에서 지뢰가 터져 불구가 됐고 뒤에 목발을 짚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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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달원 씨가 젊은 시절 집 앞에서 어구를 손질하고 있다.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 |
김달원 씨는 한참 젊은 나이에 골매마을로 이주해 이주대책위원장을 맡아 일했다. 배 댈 곳을 만들고 도로를 닦고 바닷가와 도로 사이 축대를 쌓고 집을 짓고 할 일이 태산이었다. 바닷가 축대를 쌓을 때는 일일이 돌을 날라 쌓았다. 한번은 아랫마을(신리) 방파제가 망가져 골매마을 사람들이 복구를 해줬다. 기껏 고쳐주고 난 뒤에 들리는 말은 “굴러온 돌이 본 돌 뺀다”는 소리였다. 김씨는 “그런 말 하지 마라. 우리가 쫓겨왔나, 도망왔나, 구부러져왔나”하고 항변했다. 그런 신리마을(신리1~7반)도 곧 신고리 5~6호기 건설로 집단이주할 처지에 놓였으니 원전 건설로 고향을 잃는 사람은 점점 늘어간다.
“할머니(아내) 보면서 내가 자꾸 운다. 할머니 고생 많이 했다.”
부인 심씨는 열 일곱에 김씨 집안으로 시집와 고리에 살 때는 좌천으로 고기를 팔러 다녔고, 골매마을로 와서는 남창장에 고기를 이고 나가 팔았다. 자식 열한 명 낳고 부모 모시랴 아이 키우랴 장에 나가랴 한시도 쉴 날이 없었다. 심씨는 노환으로 치매가 와 옛 일을 말하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해 대소변도 봐줘야 한다. 장남 김종길 씨 부부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김달원 씨는 “조상이 우리를 보살펴주니 많은 자식 가운데 먼저 간 이 하나 없고, 장남이 집안일에 마을 일까지 본다”고 했다.
11남매 키운 김달원, 심성옥 부부
"고생한 아내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장남 김종길 씨는 골매마을 이주대책위원장을 맡아 일한다. 새벽 3시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오후에 들어와 고기를 내리면 해질때까지 어구를 손질한다. 하지만 신암마을로 이주하면 어업권을 상실하게 된다. 김종길 씨는 이주보상비를 책정하는 물건조사를 아직 받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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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김달원 씨 부부 [출처: 울산저널 용석록 기자] | | |
골매마을 주민은 누구를 만나도 한수원 직원을 ‘한수원 놈’이라고 했다. 고리에서 이주할 때는 국가발전을 위해 이주했다 치지만 두 번이나 이주를 시키면서 부지매입비까지 주민에게 부담시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다. 2000년에 한수원 3~4호기 핵발전소가 건설이 고시됐지만 15년 넘도록 이주합의는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별도로 신리마을에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가 또 들어선다. 만일 신고리 7~8호기가 들어서게 된다면 이는 골매마을 집단이주지인 신암마을과 가장 인접한 곳이 된다. 두 번째 이주를 하기도 전에 세 번째 이주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고리가 고향이라지만 여(골매)서는 훤히 보인다. 이 자리에서 살다 죽으면 좋겠다.”
김씨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할머니에게 마실 물을 한 대접 건넸다.(기사제휴=울산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