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원자력발전소와의 인연은 고리원전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원자력발전소 주변에 살면서 원자력발전소는 착한 기업이고 우리에게 안전한 전기를 공급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또 그렇게 설명하는 정부를 믿었고 고리원전을 믿었었다. 싸움은 단순한 데서 시작됐다. 거대한 자본과 국가의 편익을 위해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해운대구 중1동이다. 그 곳은 원자력 발전소와 채 20km가 넘지 않은, 해운대가 보이는 마을이다. 우리 집 앞은 원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는 곳 이었다. 그 당시에는 기장은 경남 양산군이라,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이들은 해운대에 가정이 있고, 이들이 출퇴근 할 동안 동네사람들이 흥청거리는 그런 지역이었다.
어린 시절 월급이 많은 그곳에 취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었다. 나이를 먹으며 취업을 앞두고 있을 때 다른 곳보다 급여가 많은 원전은 나에게 일종의 환상이었다. 다른 곳보다 적은 시간을 일해도 많은 급여가 보장되는 고리 원전은 최고의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원전에 아무 의심 없이 살아왔다. 이후 아내를 만나 경남 양산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처갓집은 1986년부터 이곳에 이주해서 살았는데, 고리원전하고는 6km정도가 떨어진 곳이었다.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경남 양산군 장안읍 좌천리 마을(원전과 3km남짓)에 신접살림을 차리게 됐다. 공기 좋고 물이 좋다고 해서 시골마을로 작정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큰아들 균도가 태어나고 서울로 이사가기 까지 그곳에 사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아들의 발달장애증세를 확인하려 서울대병원을 가게 되며 그 지역을 떠나왔다. 서울에서의 2년 동안에도 조용했던 좌천이 그립고 바다 경치가 그리웠다. 2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할 때도 당연히 그곳으로 내려가야지 하며, 처갓집 인근의 경남 양산군 일광면 이천리로 내려왔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고향은 언제나 기장이었다.
그런 좋은 고향에 살면서 내가 소송을 진행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2007년 갑자기 같이 사시는 장모님이 위암 투병을 하게 됐고, 2011년 균도와 세상걷기를 기획할 때 동남권 원전이 시행하는 지역주민 무료검진을 통해 내가 직장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다음해 있었던 지역주민 무료검진에서는 균도 엄마가 갑상선암인 것이 밝혀져 암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병동에서 간호를 하며 여러 지역주민을 만났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다.
그 당시 원전은 가짜부품 사건으로 의심과 걱정을 샀고, 블랙아웃이라는 초유의 사건도 일어났다. 원전이 멈췄는데도 이를 은폐했다. 어느 날 한수원 사장이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한 기자가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면 밀양 송전탑 사건 등으로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서울 경기주변에 지으면 되지않냐”라고 질문하니, 급하게 대답하는 말. “서울 인근에는 위험해서 안 된다“. 이를 신문을 통해 듣게 되는 순간 파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 기자회견의 여파로 구의회에서 고리원전에 대한 질타와 함께 성명서가 나왔는데, 진작 원전이 있는 기장군의회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갔다. 나는 그것에 분개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녹색당 구자상 후보를 만나게 돼 소송 이야기를 조심히 꺼냈다. 혼자서는 힘이 없으니 조금 힘을 보태달라고 하니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고. 구자상 님의 소개로 변영철 변호사를 만나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은 이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역민으로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알려주지 않는 것이 분해 시작했다. 또한 가족의 피해, 아들의 발달장애. 나의 직장암, 안 사람의 갑상선암. 이것이 고리원전 때문이 아니냐는 의구심에서 시작했다.
2012년 7월 3일 부산 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으로 소송을 알렸다. 원전 주변지역의 최초 소송이라는 타이틀로 깜짝 이슈화는 되었지만, 재판이 지루하게 진행되면서 이내 잊혀졌다. 소송을 할 당시에도 구자상 님을 비롯한 녹색당 몇몇이 관심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며 묻혔다.
재판에 임하는 고리 원전 변호사들의 무신경함에 재판을 관망하는 나는 큰 바위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2년 3개월 동안 재판은 4~5번이 열렸을 뿐이었다. 우리 측에서는 매번 지역주민 암검진 결과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개인정보라서 보여줄 수 없다고 버텼다. 2014년 2월 어느 의학원에서는 짧은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그 배포자료에 다른 지역보다 2.5배 이상의 갑상선암환자가 있다, 그 배경을 알아봐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자료로 삼았다. 소송을 담당했던 서은경 변호사가 대한직업연구원에 감정을 신청해서, 갑산선암에 대해서는 원인이 있다는 회신을 6개월 만에 받게 되어 재판부에 증거 신청했다. 그렇지만 승소할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었다.
2014년 10월 17일 부산 동부지원 합의부에서 결심공판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현장에는 균도와 나만 나와 있을 뿐, 그동안 같이 했던 사람들도 다른 일정이 겹쳐버려 같이하지 못했다. 선고가 진행되면서 나와 균도는 법정에 서게 되고 판사의 “원고의 일부 승소”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혼자 당황했다. 판사가 선고 취지를 설명하는데 나는 법정을 빠져나왔고 서은경 변호사도 함께 퇴정했다.
둘이서 뜻밖의 선고에 흥분하며 그냥 웃고만 있었다. 사실 선고공판이 있기 전 서변호사는 나에게 이날 나오지 말라고 권했었다. 판결문은 송달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애써 나를 위로하였다. 패소로 인한 충격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변호사의 배려였는데, 이날의 판결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선 쾌거였다.
판결난 시각은 10시 10분이었는데, 당시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일부승소의 사실을 알렸고, <부산일보>가 급히 연락해와 1면에 대서 특필됐다. 그러면서 균도 가족의 소송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론을 타자 지역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고. 그 소송을 알리기 위해 지방선거에 나왔다. 낙선했지만 고리원전 1호기의 이야기가 다시 지역에 회자가 되는 것이 기뻤다.
소송 이야기가 전해지며 우리 사무실에 250명 이상의 사람이 자기도 암으로 고생한다고 전해왔고, 난 그 사실을 접수 받으면서 놀랐다. 다른 지역보다 사람이 덜 사는 읍면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처럼 고통 받는 줄은 몰랐다.
국내 첫 소송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원전의 존재만으로 지역민에게 영향이 있다는 판결이 원전 안전성에 의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판결 후 잉크가 마르기 전에도 항소됐다. 손해배상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한 역학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나의 부르짖음을 모른 채 자기방어에만 급급한 그들이 미울 뿐이다.
처음 소송을 할 때 7년을 보고 시작했다. 1심은 2년, 2심은 또 2년, 대법원 법리해석까지 짧아도 3년. 7년 이상의 지루한 싸움일 것이라 생각했기에 지금도 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고민거리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1심 변호사비용을 사후처리하기로 했지만, 2심도 마찬가지고 내가 패소한 부분에는 소송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1심에서 일부만 인정을 받았기에 이를 제외한 비용은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 공익소송에 임했지만 이런 부담감이 철저히 나를 누른다.
균도 가족의 소송은 대표소송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준비해야만 원전의 실체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안전한 핵발전소가 없다는 것을 지역민에게 알리고 싶다.
원전이 지역민에게 악영향이 없다는 것은 원전 측이 원주민 전수조사를 통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힌다면 인정할 것이다. 발달장애인 부모가 원자력본부와 싸우는 것은 발달장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다.
발달장애는 환경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균도 고향이 고리원전에서 3km 떨어진 곳이고 나 역시 그 마을에서 살았고 지금은 10km 인근에서 살고 있다. 발달장애의 원인이 고리 원전의 방사능 유출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균도 소송”을 진행한 것은 반핵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발달장애인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달라는 의미가 가장 크다. 우리는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애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엮어 가는 것이 나의 운동방식이기도 한다. 사회는 연대로 이루어져야한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장애인 운동에 있다. 나의 생애는 내가 아닌 아들의 남은 생애에 맞춰있기에 난 언제나 균도를 앞장세운다. 균도와 함께 하기에 다른 이들도 발달장애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장애문제를 같이 고민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