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송전탑 건설 반대 싸움을 하던 청도 삼평리 주민과 대책위 회원들은 벌금 폭탄을 맞았다. 지난해 7월 21일 새벽 한전이 공사를 강행하자 이를 정면으로 맞서 저지했기 때문이다. 약 20여 명이 총 1억여 원에 달하는 벌금으로 삼평리 주민과 대책위 회원은 모두 불법인간이 됐다. 불법인간이 된 이들의 목소리를 뉴스민에 연속해서 싣는다.
마지막 필자는 김헌주 대책위 공동대표다. 헐티재처럼 굴곡진 삶을 살았다. 김헌주 공동대표는 '할매들의 한뎃잠이라도 덜어드리자'는 마음으로 삼평리를 찾았으나, 한 순간에 삼평리에서 은사시나무, 할머니들과 '삼평리의 친구들'과 천륜이 맺어진 것을 깨닫고 삼평리의 평화를 위해 악법과 긴 싸움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가족-삼평리의 친구들
2012년 12월 초, 처음으로 삼평리를 찾았습니다. 그날 억수같이 쏟아진 눈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정수근 씨가 몰았던 환경운동연합의 승합차는 헐티재에서 몇 번이고 헛바퀴질하며 우리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를 태운 봉고차가 가까스로 헐티재를 넘은 직후부터 헐티재는 폭설로 차량통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위 인권단체의 활동가였던 우리들은, 인권주간을 맞아 고난 받는 현장을 찾아가자고 의기투합하여 폭설을 뚫고 삼평리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정동규 씨의 사과밭 입구 비닐움막에서 한데 잠자며 농성하던 할매들은 우리들을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무이처럼 버선발로 쫓아나와 마중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손을 잡아주던 할매들의 그 투박한 손에 대한 기억이 화인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내 머리를 후려치던 하나의 생각, ‘이 인연은 꽤나 길게 이어지겠구나......’. 삼평리 할매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삼평리 비닐움막 앞에서는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행사가 열렸고, 이 행사를 같이 했던 많은 이들이 다시 마음을 모아 다음해 3월 1일 삼평리 평화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날도 무척 추웠습니다. 그날 마을 냉동 창고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삼평리 할매들이 끓인 추어탕은 동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모인 사람들은 ‘청도 삼평리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삼평리 할매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삼평리와의 인연이 조금씩 깊어져가던 그 때, 대책위 문제로 누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의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주도에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고 했던가요? 전화는 제주해경에서 걸려온 것이었습니다. 호성이의 사고소식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정신없이 몇 달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호성이를 보내고 나니 삼평리를 찾는 일이 참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해 여름 ‘삼평리를 흔드는 바람’이 없었다면 저는 삼평리와 또 멀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성이 나이의 젊은이들이 ‘삼평리를 흔드는 바람’이 되어 농활을 하겠다며 삼평리를 찾았습니다. 제게는 호성이 대신 새로 얻은 가족이었습니다. 호성이의 표현을 빌려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호성이는 <뉴스민>에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가족공동체의 권력관계 속에 청소년의 자유는 없다’”라는 글을 기고했었습니다.) 삼평리 할매들과 또 다른 가족이 되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져 간 것입니다. 그 인연은 삼평리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삼평리의 친구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삼평리의 친구들은 오직 이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삼평리를 찾았습니다. ‘삼평리에 평화를’. 그 마음으로 23호기 송전탑 진입로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장승을 세웠습니다. 그해 여름 우리는 평화공원에서 하루 휴가를 보내자고 많은 이들에게 제안을 했었습니다. 배성우 아저씨(할배 아닙니다)는 찾아오는 삼평리의 친구들을 위해 자기 논을 내어 놓으셨고, 그 논에 지어진 새로운 농성장에 우리는 할매들 대신 한뎃잠을 잤습니다. 삼평리의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모두는 할매들이 한뎃잠을 자는 것이라도 막아야한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한 달에 한번, 혹은 일주일에 한번 삼평리로 퇴근하고 삼평리에서 출근하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삼평리의 추어탕이, 삼평리 평화공원 뒤편 은사시나무가, 삼평리의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그 별빛이, 삼평리를 가로지르는 아스팔트도로 옆을 예쁘게 수놓은 접시꽃이 우리 모두를 삼평리로 불렀고, 우리는 삼평리 평화공원에서 함께 삼평리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그런 우리 모두의 바람과 기도는 하늘을 움직였고 어느 날 갑자기 삼평리 평화공원입구에 뚝 떨어진 컨테이너는 예쁘게 단장되어 삼평리 평화공원의 안내소가 되었고, 23호기 길목 은사시나무 숲 옆에는 망루가 뚝 떨어져 은사시나무가 갈구하는 평화를 지키겠다고 자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삼평리는 세 가지의 평화입니다. 삼평리의 평화, 전 세계의 평화, 온 우주의 평화.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 삼평리의 평화는 팔짱 낀 채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삼평리의 평화는 약 1여 년을 이어져갔습니다. 할매들은 삼평리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적과를 하고, 감을 따고, 농성장에서 민화투도 치고, 때로는 추어탕을 나누어 먹으며 이 평화를 이어갔습니다. 이 인연을 더욱 더 질기게 이어가고 싶은 이들은 삼평리에 평화센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4년 7월 21일 새벽,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약 500여명의 경찰과 한전은 불안하게나마 이어지던 평화를 짓밟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평화공원에 펜스를 치고 점령군을 자처했습니다. 점령군들은 할매들을 짓밟고, 패대기치고, 끌고 가고, 구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삼평리의 친구들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같이 짓밟히고 같이 패대기쳐지고 같이 끌려가고 같이 구석몰이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석 달여의 전쟁을 치른 후 23호기 송전탑은 들어섰고, 점령군은 말뚝을 박고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자, 우리 이바구는 여게서 새로 시작됩니다.
“싸움이 끝난 기 아이다. 저 송전탑을 확 뽑아뿌야 이 싸움은 끝난데이......”
그라고 할매들은 다시 보따리를 쌌습니다. 스타캐미컬 차광호를 만내가 생일상을 채리 주고, 쌍용자동차 굴뚝을 찾아가가 ‘창근아, 정욱아 사랑한데이’를 외치고 세월호유가족과 함께 얼싸안고 눈물콧물을 쏟고 강원도 골프장을 찾아가 주민들과 함께 웃고 노래하고, 잘난 체하는 한전 놈들을 찾아가서 집들이 덕담(?)도 하고 그렇게 자근자근 다시 평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심다.
그라고 할매들은 마침내 호통을 칩니다.
“이 더러븐 세상 확 디비뿌야 된다!”
점령군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세 가지 법이 있심다.
‘전원개발 촉진법’ ‘송변전설비 주변지역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송주법)’‘전기사업법’
할매들 말처럼 확 디비뿔라카먼 먼저 이 노무 악법을 없애뿌던 꾸개뿌든 무슨 수를 내야합니다.
이 싸움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발끈을 단디 매고 서로를 우두바주는 자리를 가질라캅니다.
3월 6일입니다.
이날은 할매들과 함께 고향의 봄을 부르며 소주 한잔 나누는 날이기도 하지만, 점령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하며 불법인간이라고 조롱당했던 삼평리의 친구들을 위로하는 자리가 될 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3월 6일 잔치를 통해 ‘아~나! 불법’이라고 외치면서 다시 삼평리의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울 것을 결의할라 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삼평리의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법을 어겨서 깨부수는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입니다.
삼평리의 평화 만세!
삼평리의 친구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