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평범하다. 굳이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문자들이 남의 집 자식을 짓밟으면서 자기 자식 걱정을 했다지 않는가. 나는 고통의 현장에서 이런 악의 평범성을 무수히 봤다. 어제 강정마을을 폭력적으로 행정대집행한 해군, 경찰, 용역도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든지, 형제든지, 자식이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의 명령체계 안에서는 제아무리 직책이 높든 낮든 간에, 모두 한 부속품으로 전락해서 거대한 악의 기능역할을 한다. 용역 절반은 해군이 변장했다고 한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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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대집행이 이뤄진 제주 강정마을. 행정대집행에 나선 이들은 대한민국해군 이름이 찍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진=페이스북 그룹 '강정마을 사람들'] | | |
또 악한 일인지라, 요란 시끌법석할 것 같지만, 반대로 소리소문없이 사부작사부작 이루어지는 일이 더 많다. 하승수 님의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를 보니, 정부의 에너지수급정책을 세우는 데, 사업에 관하여 어떤 내용을 한 줄 넣거나 빼거나 하는 게 해당 회사에 수천억 원의 이익이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중요한 일들이 밀실에서 저들끼리만 은밀히 이루어지는 까닭은 모두가 알게 하면 감시와 견제를 당해서 이익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일이 선이냐 악이냐, 평화냐 폭력이냐, 하나님나라 일이냐 귀신의 일이냐를 무엇으로 판가름하나? 그 이익이 모두에게 돌아가는가? 아니면 일부만 독점하는가? 가 기준이 될 수 있다.
한전이나 한수원이 핵발전소와 초고압 송전탑을 지으면 자기들은 돈을 벌어서 좋을지 모르지만, 반대로 핵발전소와 초고압 송전탑이 서는 지역주민들은 공포에 빠져들고, 재산권, 생존권이 하루아침에 무가치해진다.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1월 29일 방문했던 경주월성핵발전소 지역이 대표적인 예이다. 동네가 적막했다. 핵발전소 앞에 홍보관이 있는데, 지역주민들은 내버려두고 실정 모르고 견학 오는 전국의 학생들이나 시민들에게 거짓선전만 늘어놓는다고 분개한다.
이런 일들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근사해 보인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말하자면 귀신의 일이다. 어느 한쪽만 좋고, 다른 한쪽은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일을 하나님나라 일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를 덮치는 자본과 권력의 악행은 악한 귀신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고통의 시절을 겪는 우리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어떤 신앙고백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 말씀을 대면해보자.
오늘 성경말씀은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첫 이적 사건이다. 이적사건의 내용은 악한 귀신추방이다. 귀신추방이 첫 이적사건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그 못지않게 충격적인 사실이 또 있다. 바로 그 악한 귀신이 출몰한 곳이 회당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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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귀신을 내쫓는 그림. [사진=http://blog.daum.net/hyugchang] | | |
회당은 유다교의 본거지이다. 기독교인이 교회에 모이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회당에 모인다. 유다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야웨 하나님을 예배한다. 회당 예배순서는 기독교회 예배순서와 비슷하다. 신앙고백을 하고 기도하고 모세 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설교한다.
마가는 악한 귀신 출몰장소로 회당을 거론했지만, 귀신출몰이 비단 회당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귀신은 얼마든지 가정에도 침투하고, 우리가 가담한 단체에도 있다. 또 슬프게도 교회에도 있다. 심지어 우리 마음에도 악한 귀신은 머무른다. 하나님도 내 안에 계시지만 내 영혼상태에 따라서는 귀신도 얼마든지 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회당에서 두 가지에 놀랐다. 첫째는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27절)이라고 경탄했다.
둘째는 예수가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것에 놀랐다.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꾸짖고 내쫓았더니, 악한 귀신이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악한 귀신들도 복종하는구나' 하고 경탄했다.
예수가 무엇을 말씀했는지는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앞 쪽에 보면, 예수는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이 기조로 말씀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놀랐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현저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쳤다. 무엇을 하라든지 하지 말라든지 하는 정(淨)-부정(不淨)의 말씀, 율법질서에 순응하라는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은 사람들이 조상 때부터 늘 듣던 말이다.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율법학자들이 하는 말은 식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라고 한 정치인이 말했듯이, 율법가르침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나? 자유하게 했나?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나? 아니다.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율법에 속박되어 살았다. 죄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말하는 놈들은 성전과 회당 뒤에서 구조적으로 민중들을 죄짓게 만드는 구조와 질서를 만들어 냈다. 율법은 철저히 민중을 벗겨먹는 형식으로 전락했다.
예수는 회당에서 민중이 느끼는 모순, 기득권세력에 대한 문제점들을 시원하게 긁어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궁금해하고 답답해하고,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그것은 민중을 해방시키는 가르침이었다. 사람들은 놀랐고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했다.
또 예수는 당신의 가르침이 권위있다는 것을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실증했다. 어떤 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신들을 망치는 세력들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다. 그 결과 귀신의 영향은 숱한 병으로, 특히 정신적으로 병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귀신은 무엇인가? 사람을 사로잡아 완전히 부릴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적존재이다. 귀신이 더러운 또는 악한 귀신이라 불리는 이유는, 귀신들린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귀신들린 사람은 어떻게 되나? 주인인 자신을 소외시키고 스스로 노예가 된다. 자기 속에 침투한 귀신에게 농락당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나라가 실제로 땅에 이루어졌음을 실증하는 일은 귀신에 눌린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다. 예수의 복음활동은 해방활동과 동의어이다.
귀신이 예수에게 한 말은 귀신의 일과 예수의 일이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보여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24절) 귀신은 특이하게도 간섭이라는 말을 했다. 시쳇말로 '왜 내 나와바리를 침범하느냐'는 항변이다. 귀신의 말처럼, 예수의 주된 일은 귀신을 간섭해서 사람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는 일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은 맨날 지배를 정당화하는 소리만 했지, 사람을 해방시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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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월성핵발전소 인근지역주민들은 월성 1호기 수명연장 때문에 공포에 쌓여 있다. [사진=에큐메니안] | | |
이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은 사람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살도록 하는 운동이다. 우리 세상은 어떤가? 지금도 예외없이 사람들은 그릇된 이념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진리처럼 떠받들고 산다. 그 이념에서 벗어나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이념의 독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이념도 평등해야 사람세계가 행복하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고단한 것도 한 가지 이념이 모두를 지배하기 때문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어느 한 이념에 종속되지 않은 나라이다.
또, 그릇된 선전에 포획돼서 그 선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자기를 낭패에 빠뜨린 일들을 회고해 보라. 의심하고 따지고 검증하면 더 좋았을 일을 선전에만 덜컥 넘어가서 올무에 빠진 경우가 제법 있다.
무엇보다 그릇된 정치체제에 구속되는 것만큼 악마적인 것은 없다.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악마이다. 평등세상을 완전히 깨버리고 독점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남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결국은 자신도 망가진다. 귀신은 모두를 죽게 한다. 하나님나라가 모두들 살게 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귀신을 멀리하고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수용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로 이 시대 비극은 귀신을 거부하지 못하고 계속 귀신들림에 머무는 데 있다. 되레 사람을 해방시키는 이념과 체제를 거부하고 자신이 머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자꾸만 옛 질서를 기준 삼아서 새 가치를 판단한다. 자기를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 본성은 자기중심적이어서 부단히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퇴행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세상을 살고 있다. 스피노자가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범죄로 취급될 때, 인간은 가장 분노한다"라고. 이처럼 부당한 법집행을 자행하는 범죄자들이 더 큰소리를 치는 세상이다. 귀신도 이런 귀신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귀신의 족쇄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예수가 계시다. 예수는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귀신체제와 대결하기를 피하지 않았다. 귀신이 질색할 정도로 간섭해서 그들 손아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건져주었다.
우리가 먼저 해방적 삶을 살자. 그리고 사람을 소외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이 세상 귀신의 이념과 구조에 맞서 싸우자. 사람을 해방시키는 선한 체제를 향하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