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열렸다. 뉴스민 독자들께도 한 해 살아가는 데 하늘의 은혜와 감동이 충만하기를 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신앙사조는 무엇인가? 교리신앙과 번영신앙이다. 교리신앙은 성서무오설, 예수님의 동정녀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근본주의의 오대교리)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앙이다. 근본주의 교리들은 신자들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많은지 적은지를 판단하는 공식적 기준이 돼버렸다. 신자들이 참 사람, 참 신앙을 구하는 대신, 고작 교리 안에 안주하게 했다. 또 교리신앙은 한국교회를 수없이 분열시켰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건 교단이 백 개도 넘는다. 그렇게 분열된 표면적 이유가 교리이다. 참으로 교리신앙은 은혜와 진리와는 멀어 보인다.
번영신앙은 이기적 축복과 세속적 성공이라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오늘날 세속적 성공개념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앙이 돼버렸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개인의 소원성취가 더 중요한 덕목이 됐다. 가나안 땅에서 야웨백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지배했던 바알신앙, 풍요와 다산의 신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지성소를 확고부동하게 차지했다. 이 번영신학은 교회의 말씀과 기도와 예배 속에까지 침투해서 계속 번영의 숙주를 키우고 있다. 야웨신앙 지킴이인 참 예언자들은 이 바알신앙과 항상 사투를 벌어야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긴 적보다 진 적이 훨씬 많다. 기독대중이 워낙 바알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교리신앙과 번영신앙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현실인 것처럼, 초기교회도 고대세계의 한 정신사조와 격렬하게 싸웠다. 1세기 끝무렵에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2세기에 맹위를 떨친 정신사조는 그노시스(영지주의)이다. 그노시스는 물질과 몸에 속한 것을 아주 비관적으로 본다. 물질과 몸은 낮고 악한 영이 창조한 열등한 것들로 통했다. 기독교 그노시스는 이 낮고 악한 영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거짓하나님이라고 했다. 신약의 토대인 구약을 간단하게 부정한다. 그 대신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열쇠는 앎(지식, 그노시스)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그노시스주의자들에게 구속은 개인의 죄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아예 역사적 사건으로 보질 않는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두 부분, 즉 고통을 받다가 죽은 세속적 부분과 고통에 초연한 채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환상으로 체험하는 영원한 영적 목격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신화로 본다.(『예수는 신화다』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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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주의 기독교는 영지주의자들이 문자주의 기독교라고 부르는 정통기독교에 가려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인근의 한 동굴에서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 | |
그래서 기독교 그노시스자들은 예수에 대해 가현설을 주장했다.(도케티즘, 가현설은 문자주의 기독교 관점에서 번역한 말이고, 영지주의자들은 환상설이라고 한다) 예수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예수는 겉보기로만(가현설이라는 말이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뜻의 헬라어 '도케'에서 나옴) 사람의 몸과 연관되었고, 수난을 겪기 전에 다시 그 몸을 버리셨다고 한다.
이런 사조가 당시 고대세계 대세였으니, 그 안에서 소수자로 고군분투하는 원시교회의 고충이 보인다. 참 신앙, 참 진리는 어느 시대나 항상 소수였다.
오늘 성경말씀 요한 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는 바로 이런 그노시스 사조에 대한 반발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복음서 첫 장, 첫 마디부터 강조하는 것은 영원한 말씀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고차원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다. 저자가 강력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이 육체성으로 실재한다는 거다.
요한복음은 이 땅 사람들이 육신으로 온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10절)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10절을 보면, 세상이 세 번 나온다. 단어는 같지만 개념은 다 다르다. 첫 번째 세상은 시간과 공간이 있는 인간세계를 말한다. 두 번째 세상은 예수가 창조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세 번째 세상은 그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인간들이다. 세상의 주인을 정작 알아보지 못하는 심한 모순이 이 땅 현실임을 반증한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1:12)
독자들도 그 이름 예수를 맞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기를 빈다. 그런데 실제 기독신자들은 이 말씀에 얼마큼의 비중을 둘까? 그저 성경에 있는 말일 뿐, 내 실존에는 별로 영향 없는 말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무엇이 특권이란 말인가?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1:14)
위 말씀을 토대로 해서 무엇이 특권인지에 대해 두 가지 의미부여를 하겠다.
첫째, 영지주의자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건 거리끼는 일이고, 비웃음거리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육신은 고유한 뜻이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이 두 말씀에서 보듯이, 요한복음에서 육은 천상적인 것과 구별되는 인간적 실존을 가리킨다. 지상에 얽매이거나, 쉽게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지상과 천상으로 단절된 우주론적 이원론이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즉 말씀의 육화 안에서 천상적인 것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육화한 말씀 그리스도는 지상에 얽매인 인간을 생명과 영광의 천상세계로 인도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영지주의 관점에서 육은 죽어야 할 운명의 수준 낮은 자아인 육체적 인간에 불과하다. 영지주의는 아주 선명하게 육체와 영혼을 구분짓고 육을 배타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그 경계를 허물고, 직접 내려와서 육체적 자아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는 말이다. 할렐루야!
둘째,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시는데, 구원의 동력이 무엇인가? 은혜와 진리이다. 은혜 또는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구원의 선물이다. 인간을 용서하고 구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동의어이다. 진리 또는 진실은 무엇인가? 히브리사상에서 진실은 믿을 수 있음을 뜻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한결같음, 성실함, 기댈 수 있는 현실을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쓰는 진리는 예수 안에서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실재를 가리킨다. 그 진리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뒤에, 보혜사 성령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다.(요한 14:17) 하나님의 결정체인 은혜와 진리가 온통 충만하신 분이 예수시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지금 우리 세상은 지독히도 불평등한 세상이다. 신계급사회가 돼버렸다. 권력과 자본의 갑질이 심히 괴롭다. 그노시스가 지식으로 사람에게 등급을 매겼다면, 지금 세상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탐욕)이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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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과 어울리는 예수. [출처=www.lds.org] | | |
이렇게 사람의 평등성이 사라져 버린 세상은 인정머리 없고, 야박하고, 용서없고, 가차없고, 인정사정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이에 덧붙여서 이익 앞에서는 거짓이 난무하고, 속이고 사기치고 뒤통수를 치고 덮어씌우고 배신이 일상이다. 어디에도 은혜와 진리는 발붙일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의 주인을 배척한 과오가 그 땅 사람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어떡하면 좋겠는가?
이 세상은 원래 은혜와 진리의 땅이다. 은혜와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그 원천이신 예수를 믿는 기독교회도 은혜와 진리와는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천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기독교회의 왜곡된 현실을 핑계로 내가 은혜와 진리를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모시자. 또는 그분의 전매권인 은혜와 진리를 구하는 사람으로 살자.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