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눈보라가 칩니다. 이억조(75) 할매가 사는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에는 눈 볼 일이 드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뼈가 시릴 듯하지만, 다행히 창 안쪽으로는 따뜻합니다. 억조 할매 옆으로 추호남(청도 삼평리, 73) 할매가 앉아있습니다. 오색빛깔의 조명 탓인지, 억조 할매의 얼굴은 들떠 있습니다. 주위로는 동년배의 할매 할배가 있습니다. 고단한 잠에 빠진 이들도, 억조 할매마냥 들떠서 주전부리를 꺼내놓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밀양과 청도 주민들. 15일부터 2박 3일간 전국 투쟁현장으로 송년회를 떠난 참입니다.
억조 할매가 청도에 송전탑을 세우려는 ‘한전’과 조력자 ‘경찰’에 맞서 싸운 지 6년입니다. 밀양 할매 할배는 이보다 더 긴 10년을 싸웠지요. 지난 6월 밀양 송전탑 공사 예정지에 있던 움막들이 철거됐고, 7월 청도 송전탑 공사 현장에 있던 망루 농성장도 철거 된 후 송전탑은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싸움에 지칠 법도 한데, 할매 할배는 외려 다른 천막으로, 다른 굴뚝으로 찬바람에 맞서는 사람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 저항과 연대의 약속’(72시간 송년회) 일정으로 할매 할배는 전국 11개 투쟁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가야할 곳이 많다보니 둘째 날에는 두 조로 나뉘어 순회했습니다. 15일은 구미 스타케미칼 굴뚝농성장과 강원도 홍천 골프장 반대현장을 방문했고, 16일은 한 팀은 청주의 공무원 연금 개악 반대 농성천막, 충북 유성기업, 한 팀은 과천 코오롱 단식농성장, 평택 쌍용차 굴뚝농성장을 방문했습니다. 이후 저녁에는 함께 세월호 안산 분향소와 서울 씨앤앰 케이블 고공농성장을, 17일에는 나주 한전 본사 앞까지 여정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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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 탄 밀양 청도 할매 할배. 손을 흔들어 달라고 했더니 모두 팔뚝질을 한다 | | |
스타케미칼 굴뚝농성 차광호, 할매는 차광호가 밉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매운바람이 겹겹이 껴입은 옷과 내복 사이로 파고듭니다. 청도는 초록색, 밀양은 빨간색 조끼를 맞춰 입은 것이 마을 대항 운동회라도 열린 것 같지만, 15일 72시간 송년회로 처음 도착한 곳은 운동장이 아닌 스타케미칼 고공농성장입니다. 색색의 할매 할배들을 보니 50m 굴뚝 위에 있는 차광호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대표가 두 손을 크게 흔듭니다. 밀양의 사라(83) 할매는 차광호 대표를 보자마자 “저 사람 미워. 사람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잖아”라며 눈을 곱게 흘깁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라 할매는 14일 생일을 맞은 차광호 대표를 위해 케이크를 들고 있습니다. 청도 할매들은 차광호 대표의 생일상을 차렸습니다. 미역국, 버섯 밥에 고들빼기를 도시락에 담아 올렸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차광호 대표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땅의 주인을 몰아내고 공장의 주인을 몰아내는 세상입니다. 할매들 와주셔서 너무 반갑습니다. 굴뚝에 있으면 혼자서 정말 외로워요. 할매들 생각하며 힘낼게요.”
스타케미칼 굴뚝 앞에는 구미공단의 구조고도화를 막아낸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장과 간부들도 모였습니다. 할매 할배께 구조고도화란 말은 생소하지만, 어찌됐든 노조의 승리 소식에 첫눈처럼 들떠 박수와 환호가 쏟아집니다. 환호 속에서 KEC 해고노동자 김덕원(42) 씨가 말 합니다. “20살 때 공장에 들어와 청춘을 바쳤습니다. 청도와 밀양에서 투쟁하는 어르신들도 평생을 바친 땅에서 나가라고 해 목숨을 걸고 저항을 했는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공장이 삶의 터전입니다. 이윤이 안 난다고 나가라고 하는데, 저는 이 공장에서 청춘을 묻었어요. 할머니들에게 배우며 싸워 나갈 겁니다. 반드시 할머니들도 삶의 터전을 되찾고 우리는 공장에서 다시 일 할 것입니다.”
KEC지회의 훈훈한 소식과 함께 할매들은 스타케미칼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에서 준비한 국밥을 먹었습니다. 72시간 송년회에 동행한 손소희 씨가 스타케미칼에 미리 도착해 국밥을 지켜봤더니 고기도 들어가더란 후문이 있습니다. 아, 한옥순(65) 할매가 버스에 내리자마자 스타케미칼을 배회하던 경찰에게 달려가 호통을 쳤고, 경찰이 철수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차광호 대표를 만나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할매 할배는 강원도 홍천으로 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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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C지회, 스타케미칼 해복투 노동자들과 할매 할배의 포옹 | | |
강원도 홍천 골프장 반대 주민의 싸움...밀양 청도와 닮았다
할매 할배가 특히나 공감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곳 강원도 홍천 주민들입니다. 이날 강원도에 눈이 많이 내려, 산림과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고 지어진 골프장의 면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할매 할배는 눈을 맞으면서도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지요. 특히나 조상님들의 묘지 위에 골프장이 세워진 전창철(58) 씨의 사연에서는 성토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D리조트가 지어지는 과정에서 조상 묘 4곳이 뭉개지고 토지마저 강제수용 된 전창철 씨. 전 씨는 되레 공사 방해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법원이 현장 조사와 발굴된 유해에서 DNA검사를 한 결과, 조상의 묘가 맞는 걸로 판명됐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가보니 묘지가 사라져 있었다는 전 씨. “골프장이 공익사업이래요. 그래서 토지 수용을 할 수 있대요. 묘지가 있던 곳을 포함해서 14,000평의 토지가 강제수용 됐어요. 할매들도 농사짓다가 쫓겨났는데, 우리 처지가 똑같아요. 민주국가가 재산권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할매나 우리나 합법적으로 땅과 재산을 빼앗았죠.”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연에 마음이 동했던 것일까요? 15일 저녁 인근 교회에서 홍천 골프장 반대 주민들과 함께한 송년회에 모인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친근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노래 한 곡을 조용히 합창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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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주민이 토지 강제수용 당한 위치와 골프장 전경을 소개 받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