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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12월16일 21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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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마을 사회의 연결고리, 희년공부방 20년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김규현 기자 gyuhyun@newsmin.co.kr

60~70년대 경공업 중심 산업이 활발하던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공단은 늘어난 염색공장만큼이나 저임금 노동자도 늘어났다. 나라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밤낮없이 일해 온 노동자들은 경제가 살아나는 와중에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비산동은 대구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하나였다.

80년대 노동운동가들은 공장밀집 지역에 들어가 노동자를 조직했다. 서구에도 기독교노동자의 집, 비영리민간탁아소, 날뫼터공부방 등 가난한 노동자와 그 가족을 조직하고 지원하기 위한 단체들이 생겨났다. 부모는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고, 아이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며 스스로 자라야 했다. 교육, 문화 인프라는 당연히 열악했다.

94년 기독청년운동모임 회원으로 구성된 희년공동체는 비산동 주민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마련한다. 발로 뛰며 홍보했지만, 도서관을 제일 많이 찾는 이들은 마을 어린이였다. 마을 골목골목 뛰어놀던 아이들은 놀 공간을 찾아 도서관에 모여들었다. 도서관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도서관은 그 해 “희년공부방”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을 만난다.

희년이란, 1470년부터 25년마다 돌아오는 가톨릭의 특별한 해로 자유 또는 해방을 의미한다.

올해로 희년공부방은 20주년을 맞는다. '지역사회교육공동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20년 동안 비산동과 희년공부방은 많이 변하기도, 변하지 않기도 했다.

94년,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

▲이숙현 희년공부방 선생님

이숙현(46) 씨는 희년공부방과 20년을 함께했다. 그는 94년 당시를 떠올리며 “특히 어린이들은 학교 끝나고 갈 때도 없고, 동네에 골목골목 놀던 애들이 놀 공간이 없어서 도서관에 오게 되었다. 낮 시간에 같이 놀고, 책도 읽어주고, 글쓰기도 하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진행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요구하는 생활적인 부분을 알게 됐다. 그렇게 도서관이 공부방으로 확장했다”고 말했다.

80년대 빈민지역에서 생겨난 공부방은 90년대 대구에서도 배꼽마당공부방, 날뫼골공부방을 비롯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 공부방은 가난한 아이들을 돌봐주는 역할이 중심이었다.

숙현 씨는 “당시 만나려고 했던 아이들이 절대빈곤 상태였다. 그래서 전세 2,000만 원 이하만 받았다. 맞벌이 가정, 한부모 가정, 생계의 절대적 가난을 경험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복지 개념이 강했다. 부모가 없는 낮 시간에 보호자 역할을 하는 의미였다”고 말했다.

비산동은 골목이 복잡하고, 낮은 기와집이 즐비했다. 숙현 씨도 아이들과 함께 다니지 않으면 골목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90년대 중반 대안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희년공부방 역시 단순한 교육 차원을 넘어서 아이들 인성을 키우는 대안 교육을 고민했다. 대구교육대학교 재학생들이 졸업 전 교육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으로 희년공부방에 많이 찾아오기도 했다. 

97년 외환위기는 대안교육으로서 공부방 역할에 대한 논의를 일시 정지 시켰다. 정부는 외환위기로 파탄 난 가정의 아이들을 구호해주는 역할로 공부방을 주목했다.

▲희년공부방이 있는 대구시 서구 비산동의 모습

특히, 비산동은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정부가 땅을 사들여 넓은 소방도로를 내고, 도로 주변 건물주들은 2~3층 규모의 빌라를 세웠다. 외환위기 이후 이자율이 치솟는 바람에 빚을 내서 건물을 올린 지역 주민들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99년 희년공부방은 정부 지원을 받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급식도 했다. 방과 후 방치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정부는 지역아동센터라는 이름의 상시적인 정부 지원 기관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기존 공부방들도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숙현 씨는 “97~8년도 지나면서 가족이 해체되고,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어린이들은 가족이 해체되면서 할머니 집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급식도 불안정하고, 방과 후 활동조차 불안정하던 시기였다”며 “학교 급식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과 후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는 공부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밥도 먹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지역아동센터의 모체이다”고 말했다.

94년 희년공부방과 날뫼터공부방 등이 구성했던 대구지역공부방연합회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2003년 2월,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하지 않은 전국 공부방들이 모여 전국공부방협의를 결성하고 공부방의 역사와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2004년,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희년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를 선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활동가 개인의 욕심으로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가로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가 무엇이 다르냐고 질책하는 이들도 많았다.

숙현 씨는 “(지역아동센터를) 선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다. 정부가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 구호 해야지. 십수년을 지나오는 동안 공부방의 역할은 구호나 복지 서비스를 담당해 왔는데, 사회가 변화해 새로운 기관이 담당한다면 굳이 우리까지 이걸 담당하지 않아도 되겠다. 법의 사각지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한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전국공부방협의회는 “지역사회 교육공동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는 “처음 마을에 들어간 것은 동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 지역사회의 과제들, 스스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주민들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것을 함께 풀고자 공부방, 탁아소, 일터의 모습으로 들어갔다. 지역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처음 고민을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공간이 소통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아이를 키운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확 와 닿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역사회 교육공동체'는 선행 연구도,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역사회가 함께한다는 주민운동이론을 참고해가며 공부방이란 현장에서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숙현 씨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 실제로 현장에서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서툴고 잘 안 되는 부분이긴 한데 지역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활동하면서 풀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공부방은 누구나 스스로 와서 성장해나가는 공간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 오른 희년공부방 재학생

2014년, 사회의 연결고리 지점에 내가 서 있다는 것

현재 희년공부방은 연극, 기타, 사진, 영화, 천연염색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영어, 수학 교과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프로그램은 늘 변한다. 학기별로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프로그램을 의논한다. 아이와 교사가 원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선택할 수 없다.

희년공부방은 함께하는 활동에 가치를 둔다. 숙현 씨는 “개별화되지 않는 것, 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고리의 지점에 내가 서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함께 살아가는 것,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것들을 잊지 않는다면 어디 가서 살더라도 뭔가 역할을 해낼 거다. 우리 사회가 함께 엮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자모회, 자원교사, 후원인 등도 함께한다. 특히, 졸업생들은 기수별로 모임을 만들어 졸업 후에도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졸업생이 공부방 자원교사가 되기도 한다.

자모회는 학생들의 부모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정기적인 회의와 공부방 내에서 장구교실 등을 열기도 한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자모들은 관계들을 계속 갖고 있다. 지나고 보니 애들이 그만두면 엄마들도 안 만나게 되더라. 동네 엄마들로서 자기 자체적인 조직을 하나 만들어내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스스로 욕구가 있어야 가능한데, 가능하도록 바람잡이 노릇을 해야지. 엄마들도 모이다 보면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날 것이고, 이 동네가 좀 더 으샤으샤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에 오른 희년공부방 재학생들

20년 전 구호와 복지가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가치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게 희녕공부방의 목표다.

숙현 씨는 “공부방이 건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기 때문에, 20년 세월을 보내면서 체감하는 것이 많다. 앞으로는 어떻게 변하고 성장할지 모르지만, 지나와보니 제도의 변화와 가장 밀접하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10년이 지날 즈음에 사회가 달라지면 공부방은 없어져야 되는 거야. 공부방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우리 스스로 이야기했는데. 20년 지난 지금도 어렵고 힘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며 “더 힘들어졌으면 힘들어졌지. 20년 전에는 가난한 이들은 눈으로 보면 표시됐지만, 지금은 표시가 안 난다. 다들 좀 사는 것 같아.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좋은 기종의 휴대폰을 쓰고 있는데, 실제로 그들의 부모는 고용의 불안정에 시달린다. 가정이든 정부든 사회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지원해줄 수 있느냐는 걱정이 여전히 남는다”고 말했다.

희년공부방은 오는 19일 오후, 20주년 만남의 밤 행사를 연다. 재학생들은 공연과 손수 만든 천연염색 손수건, 매듭 팔찌 등을 선보인다. 자모회의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희년공부방의 한 졸업생이 취업 후 타지에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한다. 이런 공부방이 동네마다 있는 공부방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라 본인이 특별하고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치열해지는 입시경쟁 속에서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 청소년 자살률 1위인 나라. 1등을 위해 경쟁하는 공간이 아닌,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아이들의 고민을 풀어 줄 공간이 필요한 때이다.

김규현 기자 gyuhyun@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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