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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11월25일 12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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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60)
마태 25:31-46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1세기 말 이후, 교회들의 가장 큰 현안은 예수의 재림지연 문제였다. 그 전 초기교회 신자들은 자기들 시대에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곧 다시 올 것으로 믿었던 예수는 오지 않았다.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바울의 신앙과 사상을 이어받은 후기 바울계 공동체는 재림이라는 말을 쓰는 대신, 하나님 나라가 이미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석했다.(『함께읽는 신약성서』269쪽) 그래서 후기 바울계 편지인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를 보면, 이미 하나님나라가 실현된 교회인지라 교회론이 우주적이고 매우 찬란하다.

역시 1세기 말 저작인 요한복음도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 처방으로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재림기대 대신에 역사와 현재를 강조했다. "지금/여기'의 사건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저자는 신격화된 그리스도보다는 이 세상에 사륵스(살)로 오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더 강조한다.(『함께읽는 신약성서』288쪽)

그러나 저작시기가 요한복음보다는 훨씬 앞선 80년대 저작인 마태복음은 아직은 재림지연이 큰 화두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의 지상강림에 대해 자주 말했다.(마태 16:27, 19:28, 24:30-31) 이상의 말씀들을 볼 때, 마태공동체는 여전히 주님의 강림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uzeum Narodowe, Warsaw, 최후의 심판 [출처=Pieter Aertsen 1507/08 – 1575]

그런데 마태복음서의 독자는 구약을 잘 아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마태저자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구약과 유대교 사상을 자주 인용했다. 오늘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개념들도 마태의 창작이라기보다는 구약에 있는 여러 말씀을 빌렸다.

예수의 호칭인 인자라든지 구름을 타고 영광에 휩싸여 오신다든지 심판을 하는 권세자라든지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차용이다.(단 7:13-14) 또 오늘 성경말씀 끝 절(46절)에 나오는 '영원한 형벌'이나 '영원한 생명' 역시 출처는 다니엘서(단 12:2)이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온다'는 말씀도 구약 스가랴서에 있다.(슥 14:5) 또 인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모든 민족을 갈라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모두 구약에 이미 있는 말씀들이다.(에스겔 34:17)

지금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토대들-구름, 천사동행, 강림, 심판, 부활, 영생, 영원한 형벌-이 기독교 고유사상이 아니라 이미 유대교 사상에 있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말씀 첫 절에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에 보좌에 앉을 것이다"(마태 25:31)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냐? 그렇다면 언제 이루어지느냐? 등 역사적 실제 여부나 때를 묻는다면, 하늘의 감동을 받아서 처음 이 예언을 한 구약 예언자들도, 또 이 예언을 자기 글에 차용한 마태저자도, 또 이 글을 소재로 글을 쓰는 필자도 갑갑한 노릇이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묻기 때문이다. 여하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초기 때도, 이천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같은 내용으로 심판하러 오시는 주의 강림을 고백하고 그 믿음으로 살고 있다. 애당초 이 믿음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같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기를 빈다.

오늘 성경말씀은 복음서 중에서 최후심판 내용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유일한 장면이다. 믿음의 주 예수가 최후의 심판자로, 세상종결자로 임재하신다는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인 장관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단어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한 사람)'이다. 예수는 이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고, 이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어떤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결과를 볼 때,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 나의 구원을 좌우한다는 엄청난 말씀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마태공동체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자기들 자신이다. 구체적으로 예수의 제자들, 공동체 구성원들, 복음전도자들이다. 성경은 이들을 지목하여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25:40)라고 했다. '여기 내 형제자매'는 그들 공동체 식구를 가리킨다. 그들은 정말 작은 자 중, 작은 자였다.

이들이 어떤 상황에 있기에 그토록 작은 자들이란 말인가?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태 5:11)라고 한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당시 지배세력에게 직접 표적이 돼서 탄압을 받았다. 그 까닭에 이들은 실제로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다. 재산몰수와 추방, 차별과 배제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지금도 권력과 자본의 악행을 최일선에서 겪는 사람들은 이런 험한 꼴을 당하고 산다. 요즘 시국사건에 대한 검사구형을 보니 재산몰수형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세력이 자기들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또는 대중을 조정하기 위해, 사회정치적 약자를 골라잡아서 마녀사냥, 희생양 죽이기는 다반사다. 그 음모에 기독공동체가 과녁이 되고 말았다. 마태복음 곳곳에 나오는 작은 사람 즉 제자를 편드는 말씀들은, 그들이 겪는 혹독한 처지를 암시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제자들은 냉수 한 그릇도 얻어먹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혐오대상이 됐다는 말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7) 이런 말씀도 그들이 정말 불쌍한 처지에 있었기에 나온 말씀이다.

그러니 그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고독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주변에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 세상에 혼자라는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같은 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극적인 신호다.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다면, 그것은 구세주에게 한 것과 진배없는 의로운 일이다. 그러니 임금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수여하는 것은 마땅한 보상이다.

반면에 저주받는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가? 성경말씀에서 보듯이 그들 자신도 자기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를 모른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매우 억울한 듯이 항변한다. 그때 임금은 대답하기를,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떤 해코지를 한 게 아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다.

왜 이들은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도와줘 봐야 돌아오는 게 없을 것은 당연하고,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한편이 된다는 것은 별로 폼나는 일이 아니다. 또 그 탄압대상이 권력이 미워하는 대상일진데, 도와주면 같은 편으로 간주하거나,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또 원래 그런 자들은 워낙 교양과 체신을 중시하므로, 중립을 가장하여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는 게 특기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임금은 그들에게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라고 명했다.

오늘날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서 시대에는 예수의 제자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나로서는, 사람들이 작은 교회라고 하찮게 보는 것 같아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축에 넣고 싶지만,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이 대거 교회에 들어와 있고, 또 친권력적인 기독인이 많아서, 무시할 수 없는 이익단체가 돼 버렸기에 예수와 오늘날의 교회를 동일시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렇다면 오늘날 진짜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유우성 씨. [사진=인권오름]

스스로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움과 연대가 없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빈곤의 벼랑에 몰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수구기독인들에게 마귀새끼로 정죄당하는 성소수자들도 있다. 국가정보원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간첩으로 조작이 가능한 탈북자들도 그중 하나다. 또 오늘날 양식이 없어서 굶기보다는 저항수단으로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피치 못하게 공중으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하자면 자본과 권력이 조장하는 불의와 악행 때문에, 굶주리고, 목마르고, 떠돌이가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 실례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렇게 권력과 자본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야박하고 몰인정한 세태에서 진정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임금 예수께 복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보다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다. 거룩한 가치가 실종되고 오직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의 두드러진 증상은 사람들이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 생존에만 매달려서 파편화돼 가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자본에 매우 순응적이 돼서 군소리 없이 시키는 일에만 종사한다. 이 끝이 어떻게 될까 심히 염려된다.

우선 약자의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그 고통을 똑같이 짊어진 시민들 덕분이었다고 한다. 가슴이 뛰지 않으면 절대 안 움직인다. 하늘 영이 내 가슴을 뛰는 가슴으로 만들어 주기를 구하자. 그래야 무엇을 하게 된다. 약자의 고통에 무심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저주받고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지 마라.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한 예수가 모델이다. 

▲(왼쪽부터) 스타케미칼 분할 매각 저지와 해고자 복직 투쟁을 요구하며 공장 굴뚝에 오른 지 200여 일이 되어가는 차광호, 코오롱 해고자 복직 투쟁을 10년 째 벌이다, 최근 20여일 째 단식 농성 중인 최일배, 고공농성에 돌입한 씨앤앰 노동자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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