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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11월13일 16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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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태의 우즈베키스탄 방문기 (3)
50만 고려인이 모국과 육로로 교류할때까지 행복하길

이헌태(대구 북구의원) heontael@hanmail.net

[편집자 주] 이헌태 대구시 북구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독거노인 쉼터 '아리양 요양원' 원장을 지냈다. 그는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을 열흘 간 다녀왔다. 원장을 지낸 '아리랑 요양원'도 다녀왔고, 고려인 집단촌 시온고 마을의 고려인 노인회관도 들렀다. 우즈베키스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그는 열흘간의 방문기를 블로그(http://blog.daum.net/heontae/)에 남겼다. <뉴스민>은 이헌태 의원의 동의를 얻어 우즈벡 방문기를 3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 기간에는 고려인 가정집도 방문했습니다. 두 곳을 방문하면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사회가 80년 만에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격변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먼저 고려인 독거노인의 안식처 아리랑요양원 사무국장인 유 세르게이의 부친인 유 콘스탄틴 (70세, 고려인 2세) 집을 찾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 중심가에서 약 30분가량 떨어진 교외 전원 도시 치르칙에 살고 계십니다. 치르칙은 텐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치르칙 강과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르박 호수로 이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기온과 풍광이 좋아서 구 소련시절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유 어르신은 제가 아리랑요양원장을 할 때 항상 의지하던 탁월한 만능 기술자입니다. 아들 세르게이와 함께 아리랑요양원에 멋진 베란다를 만들고, 정원 연못을 만들고, 닭장을 만들고, 벤치의자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상하수도 시설과 가전제품까지 고쳐 주었습니다.

지금 살고 계신 과수원과 텃밭이 딸린 단독 양옥 주택을 손수 설계하고 지었으며, 5년 전에는 손녀를 위해 집에 간이 수영장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구 소련 시절 비행기 공장 전기기술자를 지냈고, 이어 대형농장 관리책임자로 일하셨습니다. 이 정도의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분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큰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 어르신처럼 화려한 경력이 없더라도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대부분의 고려인 남자들은 혼자 힘으로 집을 짓거나,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전인적 인간’으로 자랐습니다. 공부면 공부, 기술이면 기술, 기술도 분야별로 배워 온 우리나라의 ‘분절적 인간’과는 정반대입니다. 시장 경제와 상품 경쟁, 전문화를 중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성인 남자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구소련 시절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란 성인 남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아리랑요양원은 유 콘스탄틴 부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제가 50만 고려인 숙원사업인 아리랑요양원을 설립한 보람만큼이나 두 분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 어르신의 딸은 10여 년 전에 한국 공무원과 결혼, 한국으로 이주해서 1남 1녀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부모님과는 매일 인터넷으로 화상대화를 합니다. 인터넷 통신이 부모 자식 사이의 정을 더욱 두텁게 해 주는 끈끈한 아교역할을 합니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시골과 극동 아시아 한국 사이 5,000km나 되는 거리를 뛰어넘어 가족끼리 매일 서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전할 수 있다니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한 천지개벽입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유 콘스탄틴 어르신을 만나자마자 와락 껴안았습니다. 오랜만에 뵌 형님처럼 느껴져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세월 탓인지 4년 전보다 주름도 더 파이고, 기운도 없어 보이고, 약간 더 늙으신 듯하여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구 소련 시절에는 대우와 존경도 받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도 누리셨겠지만, 지금은 가난한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평범한 고려인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같은 동포로서 어쩐지 서글퍼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리랑요양원장 시절에 유 콘스탄틴 어르신이 우즈베키스탄 대표음식인 샤슬릭 (고기 고치구이)을 아주 맛있게 만드셔서 먹고 싶을 때는 가끔 어르신 집을 방문해서 늦으면 그 댁에서 자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방문하니 집이 깨끗하지만 어쩐지 황량하고 세간살이가 별로 없어 이유를 여쭈었더니 러시아로 이사 가기 위해 집을 내놓았다고 하더라구요.

약 7~8만불에 집을 내놓았는데 내일이라도 팔리면 형제들과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러시아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로 바로 옮기려고 한답니다. 의아했습니다. 유 콘스탄틴 어르신이 태어나서 70년 평생을 살았던 정든 땅을 왜 갑자기 떠나시려 할까요? 

“러시아로 가면 치르칙에 살고 있는 고려인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여기 친구들은 벌써 다 러시아로 이주했고 자기만 남았다”고 푸념을 하시네요.

아리랑요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유 세르게이 사무국장도 아버지 집이 팔리기만 하면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로 이주할 생각이라는데, 그곳에서 사업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외동딸도 좋은 교육을 시킬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제가 우즈베키스탄을 떠난 후 지난 4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1991년 구 소련이 무너지면서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이후 우즈벡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요양원장을 하던 시절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나 봅니다. 그전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그럭저럭 잘 살아온 고려인들, 특히 나이 드신 어르신들까지 우즈벡 민족주의 때문에 그곳의 삶이 팍팍하면서 러시아로 대탈출하고 있습니다.

지난 1937년에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뒤 80년도 안되어 다시 민족 대이동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러시아어를 사용했는데,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민족주의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소련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어만 사용해 오던 고려인들은 원치는 않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우며 우즈베키스탄 민족처럼 아예 정착하든지, 러시아로 다시 이주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살았던 한국으로 이주를 하든지 해야 합니다.

한 가지 선택지인 한국 이주는 현실적으로 여러 제약조건 때문에 재외동포 취업방문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동향을 보면 결국 고려인 대다수의 선택은 러시아 이주밖에 없습니다.

고려인들에 따르면 러시아는 과거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폭압적 민족 강제이주 국가시책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얼마 전부터 고려인 어르신들에게 미국이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비행기 왕복표를 매년 1편 주고 노후 연금도 더 지급한다고 합니다. 이런 유인책 덕분에 우즈베키스탄 거주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보다는 그래도 경제사정이 더 낫고 고려인 차별이 덜한 러시아로 생존터를 대거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20년도 남지 않은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1백주년이 될 시점에 우즈베키스탄에는 고려인들이 강제이주하기 전처럼 아예 흔적조차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 하러, 또는 먹고 살길을 찾아 러시아 극동으로 떠났던 우리 동포 1세대와 2, 3세대들은 5천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구하고 한 맺힌 운명을 우즈베키스탄에서 아직도 겪고 있습니다.

유 콘스탄틴 어르신 집을 방문하면서 이번 우즈베키스탄 체류 기간 동안 샤슬릭을 너무 많이 먹어 샤슬릭은 준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더니 채소국에 버섯볶음, 김치 등 고려식 반찬으로 풍성하게 대접해 주셨습니다. 제가 떠날 때는 집에서 직접 키운 포도와 호도를 한아름 가득 주셨습니다.

아리랑요양원장 시절 3년간 친하게 지내며 따뜻한 정을 나누었는데,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기약도 없는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작별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데 러시아로 정치 없이 떠날 유 콘스탄틴 어르신의 방랑인생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습니다.  

유 콘스탄틴 어르신 댁에 이어서 대구 영남이공대학교 유학생인 홍 율랴의 부모님 댁도 방문했습니다.

제가 대구에서 한국의 명절 때 율랴를 비롯한 대구의 우즈베키스탄 유학생들에게 조촐한 식사를 대접하고 기념 선물을 주며 이역만리 고향을 떠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래주곤 했는데, 이 때문인지 율랴 부모님께 연락을 했더니 꼭 집에 방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홍 율랴 양의 부모님 댁은 타쉬켄트 시내 단독 주택가에 있습니다. 자그마한 텃밭이 있는 구소련 시절 지은 집인데, 제가 방문했을 때는 율라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일하다 잠시 귀국해 있으면서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집수리하고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귀한 손님이 오면 예외 없이 샤슬릭 요리를 만들어 내놓는데, 저는 어지간하면 사양했겠지만 이 댁에서는 결코 사양할 수 없었던 샤슬릭에 와인과 과일까지 융숭한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평소 율랴가 “우리 집 샤슬릭이 최고”라며 늘 자랑했듯이 과연 이 댁의 샤슬릭은 일품이었습니다.

율랴 부모님 댁에서 무남독녀 율라의 귀여운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가족사진첩을 넘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소련시절 고려인들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키스탄인, 그리고 다른 민족들과 함께 민족 구별 없이 이웃처럼,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낸 사진이 많아서 다민족국가인 구소련에 대해 인상적이었습니다.     

율랴의 부모는 약 4년 정도 한국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귀국했는데, 다시 비자를 받아 한국에 나갈 예정이랍니다. 율랴의 어머니는 다른 고려인들과 달리 젊은 시절 인쇄소에서 우즈베키스탄어를 배울 기회가 있어 지금도 우즈벡 말을 능숙하게 잘하기 때문에 비자를 빨리 받을 수 있었다며 무척 좋아했습니다.

율랴 부모님들처럼 고려인들 가운데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한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할 능력이 있는 고려인들이 취업 비자를 통해 제한적으로 한국을 오가는 불편 없이 언제든 그들 부모의 나라, 조부모의 나라인 한국에 가서 취업하고, 이주하고,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정책이 더욱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고려인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리랑요양원장 시절 함께 근무한 고려인 직원들, 카자흐스탄과 한국을 오가며 옷 장사를 하시는 분, 한국인이 운영하는 안경점에서 일하시는 분 등등.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수많은 고려인들과 식사도 하고 정담도 나누며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사회의 최근 동향을 더 잘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아픔과 걱정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민족, 같은 동포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동포애를 가슴 속 깊이 느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다양한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특유의 향료가 배인 샤슬릭 요리는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릴 정도가 되었고, 고려인들의 영원한 보양식인 개장국(한국 보신탕)으로는 원기를 보충했으며, 시원한 고려 국시를 비롯한 다채로운 고려인 음식을 골고루 맛보며 호사를 누렸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저는 아리랑요양원 어르신과 재상봉의 기쁨과 감격만 누렸던 것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 가장 큰 시련, 즉 ‘제 2의 유랑’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민족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 낯선 땅 러시아로 이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그 조상들까지 대대로 살던 고국인 우리나라로 이주하는 일은 정녕 불가능할까요?

경제적 관점에서도 앞으로 남북이 교류하고 두만강 바로 너머 러시아를 통해 우리 한민족이 유라시아 대륙과 제대로 이어질 때 구소련 지역에 사는 고려인 50만 명은 우리의 파트너로서 아주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에 한국 정부와 우리 국민은 고려인 동포에 대해 민족적, 동포적, 인구적, 경제적 관점에서 향후 50년을 내다보고 이들을 과감하게, 따뜻하게 감싸 안는 통 큰 재외동포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조선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등졌던 재소련 동포인 고려인들도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재외국민들과 다름없이 예우하는 정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50만명 고려인들이여! 남북이 지금보다 더 평화롭게 지내고 모국이 유럽과 러시아와 육로를 통해 교류할 때까지 모두 잘 버티시고, 어느 곳에 계시든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이헌태(대구 북구의원) heonta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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