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었다. 학교, 직장, 정당, 사회단체, 교회 등에서 만난 사람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도 있고, 나쁜 기억으로 남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어떻게들 지내는지?
특히, 나는 교회사람들이 궁금하다.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그래서 모교회를 떠나게 하였던 그 목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꽂고 다닌 후배, 지금은 물색을 차리는지? 전도사 시절, 개척교회 헌금을 몽땅 가로채서 야반도주한 그 여집사는 지금 어찌 살고 있는지? 새엄마와 사이가 안 좋아서 가출한 그 학생은 그 후 잘 살고 있는지? 하나하나 거론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안부와 근황이 궁금한 사람들이 많다. 무엇보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들이 지금도 예수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또는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지? 이다.
대구에 내려오기 직전이었던 2006년에 '새민족교회 20년사'를 썼다. 네 명이 20년사를 나눠서 썼는데, 나는 초창기 시절을 맡았다. 그 까닭에 초창기 교우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취재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거다. 그래서 좀 씁쓸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거쳐 가지만, 신앙을 간직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개는 자기가 좋아서 교회를 다닌다. 그런고로 마음이 식거나 환경이 바뀌면 자연스레 교회도 멀어지고 교회가 멀어지면 신앙도 그만큼 멀어진다. 신앙의 무신성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우리 의식에 들어와 있다. 오늘날 무신성과 물신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다가, 교회가 저지르는 한심한 헛발질에다가, 수많은 사람관계에서 생기는 상처와 단절을 감안한다면, 신앙을 간직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다.
한때는 저마다 예수를 말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교회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삶의 조건이 바뀌면서, 신앙행보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 신앙이라는 게 참 보잘것없다는 안타까움도 든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영혼과 마음을 담아서, 주체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결단코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삶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지키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말씀을 이해하는 핵심단어는 세 개다. 하나는 '열 처녀' 둘은 '한밤중에' 셋은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이다.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이다. 신랑신부와 함께 잔치를 빛내는 훌륭한 보조자이다. 성경은 열 처녀 중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했다.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의 차이는 등불의 기름준비 유무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을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함께 기름도 마련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차질 없이 맞이하기 위하여 기름은 필수품이다. 그러므로 등불 기름을 따로 준비하지 않은 일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이야기 소재들은 모두 은유이다. 액면 그대로 혼인잔치를 할 때 신부 들러리는 꼭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하려고 성경말씀을 남긴 게 아니다. 그럼 성경이 진짜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마태 25장 1절에 "하늘나라는 ~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저자는 하늘나라에 필요한 덕목을 말하고자 한다. 이 전제하에 말하자면, 기름은 하늘나라 품성이다. 하늘의 자비를 덧입기 위한 나의 비움이다. 내가 비워져야 하늘영도 들어오고, 가난해지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 내가 비워지지 않아서 내 자아로 내 의로 내 주관으로 꽉 차 있으면 하늘 은사는 들어올 틈이 없다. 탐욕의 죄성 때문에 가난은 더더군다나 들어올 수 없다. 불의에 가까운 내 본성 때문에 정의는 언감생심이다.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을 늘 절감하여서 항상 하늘은총이 자기를 덮어주기를 갈망한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슬기로운 이유이다.
두 번째 핵심단어 '한밤중을' 보자. 결정적인 일은 항상 한밤중에 일어난다. 가장 어두운 때이다.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시각이다. 또 모든 사람들이 지쳐 떨어져 있을 때다.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어버리는 시각이다.(25:5) 그래서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5:13)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우리 삶을 하늘의 뜻에 맞추라는 말이다. 하늘의 영으로, 하늘의 심성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예언자의 심성이다. 불의가 성행하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정의에 대한 강렬한 목마름으로 사는 것이다. 한밤중을 겪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권력과 자본에 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 중, 이 날벼락을 원한 사람은 결코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더라도 중요한 것은 한밤중이라고 굴복하는 게 아니라, 신새벽이 올 때까지 견디는 것이다.
세 번째 핵심단어는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이다. 신랑이 왔다는 것은 결정적 사건이 드디어 임했다는 말이다. 히브리원조가 그토록 갈구하던 평등세상이 다시 임했다는 거다. 역사와 교회의 주인인 예수가 종말에 오셨다. 그래서 하나님나라가 완성됐다.
그런데 이 나라는 누가 맞이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이 맞이한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맞이한다. 지금 세상이 도저히 사람이 옳게 살아갈 수 없다고 뼈저리게 괴로워하는 사람이 맞이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고, 찾는 사람이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신다고 했다.(마태 7:7)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류로 번듯하게 사는 사람보다 소수자로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이 훨씬 복되다. 그만큼 이 사회의 어두운 곳, 아픈 곳, 고통의 현장, 모순의 현장을 보고 겪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더더욱 절실하게 하늘의 섭리와 주권과 개입을 바라기 때문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도 변방인 나사렛 출신이다. 덕분에 예수는 경제정치 강도의 소굴인 예루살렘의 관점이 아니라, 낮은 자, 민중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 덕분에 제도와 형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실제로 경험했고 그분과 소통했다.
미련한 처녀들은 바로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이다. 이 편한 세상이 아니라 저(자기) 편한 세상에 만족하고 안주하면서, 하등 현실불의에 대해 공분하지 못하고, 권력자들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결정적인 때에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거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눠 쓰자고 하는 것을 슬기로운 처녀들이 거절하는 게, 야박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 기름이 하늘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기비움인 것을 아는 이상, 그 기름은 아무에게나 쉽게 나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처럼 미련한 처녀들은 결정적인 때를 대비하여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성찰하지도,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도,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도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이고 하늘의 섭리이다.
어느 시대든 신앙을 고수하는 게 만만했던 시절은 없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차라리 표면적으로 박해가 일어나면, 분간하기 쉬우므로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맘몬과 하나님이 겹치고, 주류의 이데올로기가 진실로 포장되는 시대에는 엔간한 분별력이 아니면 악마에게 포섭되기 딱 좋다.
게다가 지금은 다원주의시대이고, 종교없음이 대세인지라, 누구에게 신앙을 말하는 것이 환영받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최후에 하늘과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 그때 삶의 태도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구원을 좌우한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진리를 표방하는 주요한 실체이다. 교회의 역할과 기능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세상이 교회를 하찮게 여길지라도.
슬기로운 처녀들이 보여준 처신으로 살자. 기름으로 은유한, 하늘을 모시려는 자기비움, 한밤중으로 비유된, 어둠의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는 예언자의 정서로 깨어있음. 또한, 결정적인 때에 맞게 신랑을 맞이하는 준비성을 갖추자.
열 처녀가 모두 들러리였지만 모두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듯이, 우리의 구원과 종말도 전적으로 나의 결단과 실천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다수의 의지처나 삶의 조건, 시대풍조에 포섭되지 않고 주체적인 신앙을 간직하자.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풍조에 대해 하늘의 기운으로 잘 분별하고 검증하고 옳게 서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