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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11월07일 16시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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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태의 우즈베키스탄 방문기 (2)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

이헌태(대구 북구의원) heontael@hanmail.net

[편집자 주] 이헌태 대구시 북구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독거노인 쉼터 '아리양 요양원' 원장을 지냈다. 그는 얼마 전 우즈베키스탄을 열흘 간 다녀왔다. 원장을 지낸 '아리랑 요양원'도 다녀왔고, 고려인 집단촌 시온고 마을의 고려인 노인회관도 들렀다. 우즈베키스탄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그는 열흘간의 방문기를 블로그(http://blog.daum.net/heontae/)에 남겼다. <뉴스민>은 이헌태 의원의 동의를 얻어 우즈벡 방문기를 3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우즈베키스탄 방문기간에 고려인 노인회관과 고려인문화협회 알말이크 지부도 방문했습니다.

고려인 노인회관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최대 집단촌인 타쉬켄트주 아흐마드 야사위(고려명 시온고) 마을에 있고, 고려인문화협회 알말이크 지부는 수도 타쉬켄트시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가량 떨어진 지방도시 알말이크 시에 있습니다.

[사진=의헌태 의원]

최 게으르기 시온고 마을 고려인 노인회장(1948년생, 고려인 2세)과 김 알라 고려인문화협회 알말이크 지부장(1950년생, 고려인 2세)은 제가 아리랑요양원 원장을 지낼 때 자주 교류하며 형님과 누님처럼 친하게 지내온 분이며, 지난해 경상북도가 실크로드를 탐방하면서 펴낸 책 ‘뜨락또르와 꺄츄사들’에 소개된 고려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책도 전해줄 겸 인사차 들렀는데, 마치 연락이 끊겨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던 가족끼리 재회한 것처럼 감개무량했습니다. 

시온고 고려인 노인회관은 아리랑요양원 뒷문 바로 뒤에 있어서 원장 시절 수시로 오고가곤 했습니다. 

시온고 노인회관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10여 명의 어르신들께서 포커를 치며 여가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어르신들은 우리나라 여느 경로당에서 볼 수 있는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들이십니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부모로부터 한국말을 배워온 탓에 북한식 말투지만 모두 우리말을 잘하십니다. ‘뜨락또르와 꺄츄사들’ 책에 소개된 최 게으르기 노인회장과 박 알렉산드르 어르신(1930년 생, 고려인 1세)을 뵙게 되니 더욱 반갑더라고요.

제가 아리랑요양원장으로 일할 때 요양원 어르신을 잘 보살피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지만 이 동네 고려인 어르신들도 가끔 요양원에 초대해서 식사 대접을 하며 동포의 정을 나누곤 했습니다. 고려인들은 현지 우즈베키스탄 민족의 음식과 현지 기후 풍토에 맞추다 보니 된장국이나 채솟국에도 무조건 고기를 넣는 등 기름기 있는 음식에 익숙한데, 특히 한국 라면을 무척 좋아해서 수입라면을 가끔 구해서 대접한 기억도 납니다.

이번에는 3년 8개월만의 방문인데도 어르신 모두 저를 잊지 않으시고 “원장으로 다시 온거냐?”, “그때가 참 좋았다”, “원장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등 혈육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구소련권 50만 고려인 동포사업의 상징인 아리랑요양원이 이 마을에 설립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우즈베키스탄 최대 고려인 집단촌이기 때문입니다. 마을 한가운데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 가로수길이 쭉 뻗어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자연스레 보여줍니다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극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지만 정착 마을에 소나무를 심고, 김치와 된장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최 게으르기, 박 알렉산드르에서 보듯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바꾸었지만, 성은 조상이 물려준 대로 사용하고 있어 같은 동포로서 정체성과 동질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뜨락또르와 꺄츄사들’ 책에 나오는 최 게으르기 노인회장의 고려인 이주와 정착 얘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사진=의헌태 의원]

안타깝게도 어르신들에 따르면 이 고려인 마을이 갈수록 급격히 쇠락하고 있더라구요.

“원동에서 고려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이름이 ‘시온고’였습니다. 어쩌면 중국어일 수도 있습니다. 수찬 강가에 있었고, 러시아 이름은 니꼴라이예프까라고 했지요. 거기 제 조상들이 있었고 그 마을이 통째로 여기로 이주해 왔습니다. 지금 장소로 왔을 때가 1939년 말, 40년 초였습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땅속에 있는 굴 같이 생긴 것이 있었고 고려인들이 그 굴을 깔두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40년에 개간하기 시작하여 벼농사를 했습니다. 갈대를 일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기계가 없었고 공구도 대장간에 가서 사람들이 알아서 맞췄습니다. 힘이 좋은 사람은 더 큰 곡괭이를 만들기도 했지요. 마을에서 21명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나왔는데 1951년에서 1953년 사이입니다. 주로 재배한 것이 닥나무, 목화, 벼였습니다. (노동영웅 중에서) 아직도 살아계시는 분이 딱 한 명 있습니다. 김 예까째리나라는 분인데 조상들의 고향(연해주)으로 이사 가셨지요.”

그러면서 최 게으르기 노인회장은 책 말미에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라며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앞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젊은이들이 자꾸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인구는 고령화되고 나면 마을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가슴이 아픈 일이지요. 저희 부모님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만들어 놓은 마을인데 영원히 역사 속에 잊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쉽고 가슴이 아픕니다. 어쩌면 저희 세대는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작은 추억거리조차 남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시온고 마을에 사는 박 알렉산드로 어르신도 이 책에서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란 글을 통해 굴곡과 한 많은 인생사를 내보이셨죠.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울음은 미처 소리가 되지도 못하고 정적 속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리는 그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가 다시 입을 떼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든네 해를 사는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였다.

고려인들은 ‘깔’로 지은 집을 “깔두막‘이라고 했다. 대부분 고려인들이 1937년 우즈벡에 도착했을 때 땅굴을 파거나, 외양간에 들어가거나 이도 저도 마땅치 않으면 깔로 흙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1950년에 마을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할 때까지 깔두막에 살았던, 가장 늦게까지 집을 갖지 못했던 이들 중에 하나였다.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신을 거 못 신고, 조그말 때부터 일했던“ 그의 서러움을 깊었다. 할머니, 부모님, 누나, 동생과 함께 1937년 우즈벡으로 실려 왔지만, 아버지는 4년도 안 돼서 죽었다. 동생도 홍역을 앓아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젊은 엄마는 무심하게도 자신과 할머니를 버리고 꿀륙 시장에 큰 집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렸다. 외할머니는 그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그는 홀로 남은 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죽도록 일했다. 1955년에 결혼을 하고 ’뜨락또르‘ 운전수를 하면서부터 조금씩 벌이가 나아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1954년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가슴속 깊은 곳에 소리 없이 묻었다. 자식에게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요즘처럼 부족한 것 없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말해봤자 어차피 모를 이야기였다.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아들 넷, 딸 하나의 생일 잔칫상만큼은 모두 차려준 것이 그의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었다.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서 뭐 하겠소” 고생이라면 자신 하나로 족하다 생각한다. 긴 이야기를 마친 다음 날, 우리는 새벽부터 텃밭에 나와 일하던 그를 다시 찾았다. 그의 아내가 부산을 떨며 뜨거운 ‘시락장물’을 내놓았다. 그의 텃밭을 구경하면서 넌지시 “저도 할아버지처럼 농사를 잘 지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농사, 배우지도 마시오, 배워서 무얼 하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대답이 서러웠다.

실제로 이 고려인 마을은 갈수록 급격히 쇠락하고 있습니다. 구소련시절에는 마을 주민 약 3천 명 가운데 90% 이상이 고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1991년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고려인들이 계속 마을을 떠나면서 지금은 고려인 비율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고, 그 자리를 우즈베키스탄인이나 카자흐스탄인이 대신 채우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희망도 없다 보니 그래도 경제사정이 더 나은 러시아로 이주하는 분들도 계시고, 일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거의 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가서 마을은 노인과 어린이만 남은 적막한 시골로 전락했습니다.

제가 떠난 4년 사이에 고려인 이탈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려인들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생존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강제이주 이후 70년 만에 다시 최대의 시련과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제2의 유랑’이 시작된 것 같아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어르신들은 시온고 마을이 구소련 당시 소련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콜호즈(집단농장)이며, 수많은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탄생시켰지만, 지금은 고려인 집단촌이라는 이름만 남았다며 한숨을 짓더라고요. 고려인 집단촌이라는 이름조차 머지않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도 고려인 마을이 점차 사라지고, 고려인이 다시 러시아로 이주하는 모습을 볼 때 구소련 시절 고려인 50만 명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에 20만 명이 살아서 고려인의 수도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이제는 과거의 일이 되고 있습니다. 무작정 러시아로 정착하러 떠나는 고려인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독일과 이스라엘처럼 같은 민족이 언제라도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면 귀국시켜 살 집과 일자리를 주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려인들에게 재외동포 방문취업 비자 제공이라는 제한적 동포 포용정책을 펴고 있는데, 법과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꿔서 고려인 동포들이 모국에 자유왕래, 자유체류, 자유취업, 그리고 자녀교육의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고 외국인 노동력은 점점 더 필요해지므로 이들 고려인 동포들의 고국 정착은 모국에도 이익입니다.

우즈베키스탄 방문기간에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 알말이크 지부도 들렀습니다.

알말이크시는 수도 타쉬켄트시에서 약 1시간가량 걸리는 지방 대도시인데, 고려인문화협회 알말이크 지부는 지역유지인 김 알라 지부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전국 어느 지부보다도 고려인 동포 사회를 잘 이끌고 있는 곳입니다.

이번에 방문해 보니 더 멋진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한켠에 고려인문화협회 사무실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주어 매주 수요일 고려인 30-40명이 이곳에 모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식사도 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면면히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김 알라 지부장은 제가 아리랑요양원장 재직시 타쉬켄트시에서 열리는 고려인문화협회 전국행사 때 자주 뵈었는데, 알말이크 지역에 사는 불쌍한 고려인 어르신들을 발견하면 저에게 바로 연락을 주시고, 가끔 아리랑 요양원을 방문하셔서 입소 어르신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시는 등 고려인 동포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훌륭한 고려인 일꾼입니다. 지난 2010년 성대하게 치러진 환갑잔치에 초청해 주셔서 즐겁게 보냈던 추억도 다시 떠오릅니다.  

김 알라 지부장은 ‘뜨렉또르와 까추사들’ 책에서 ‘절름발이 여인의 꿈’으로 소개된 장애를 딛고 성공한 감동의 인물입니다. 책 내용을 잠시 옮깁니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하다가 기적으로 재활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한쪽 다리를 절었다. 하지만 아픈 다리는 그가 지금처럼 당당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50년 타슈켄트 근교의 고려인 마을 김병화 농장에서 오 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장에서 ‘뜨락또르’를 모는 운전수였다. 어느 날, 사고로 심장병을 얻은 아버지는 그 후로 앓다 쉰하나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벽돌 굽는 일을 해서 가족들을 건사했다. 걷지 못해 팔로 기어 다니던 그는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러시아 쿠르간의 병원에서 지냈다. 마침내 수술에 성공해 서른다섯 살이 되는 해에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를 깊이 사랑했던 남자 김 게라심을 만나 함께 해온 지난 시간은 가난, 재활수술, 주변의 냉대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둘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 세월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어느새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김 알라 지부장은 제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저녁이 되기 전인데도 보드카와 닭 그릴 요리, 시원한 고려 잔치국수를 대접해 주셔서 너무 고맙고 황송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태양과 같은 달을 보면서 지구촌에 사는 우리 700만 재외동포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고, 모두 따뜻하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느꼈습니다. 

요양원 입소 노인 가운데 최 이반 어르신도 김 알라 지부장이 연결시켜 준 분입니다. 김 지부장의 사위가 시골에서 농장을 하고 있는데 움막을 짓고 혼자 사는 남루한 고려인 어르신을 발견하고 저희에게 알려 와서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지금 최 이반 어르신은 너무 행복하게 잘 계십니다. 

민족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역만리에서 김 알라 같은 고려인 지도자들이 우리 동포들을 엮고 아우르니 너무나 든든하고, 대한민국 국민과 한국 정부를 대신하여 마음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리랑요양원 설립을 주도했던 저도 미력이지만 고려인 동포사랑에 크게 이바지한 것 같아 한없이 기쁘고 뿌듯합니다. 김 알라 지부장님 다음에 또 뵐 때까지 일 없이(‘별다른 사고 없이’란 뜻의 북한 말투) 건강하시고 행복하이소. ^^

이헌태(대구 북구의원) heonta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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