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살면서 무수한 사람을 겪은바, 나름 체득한 경험칙들이 있을 거다. 내가 요즘 사람에 대해 부쩍 느끼는 경험칙이 있다. '기대한 만큼 실망한다'이다. 특히 어떤 일을 할라치면, 사람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그럴 때 기존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사람들이 도움이 돼 줄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한 사람일수록 기대를 채워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히려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 관계망에 있지 않은 사람이 홍길동처럼 나타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경우가 더 많다.
이런 문제의식은 시민사회단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단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단체보다는 깨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직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느냐는 고민을 한다. 사람들은 한 개인이 못하는 일을 단체가 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래서 실제 단체가 어떤 일을 벌이기는 수월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을 끝까지 붙잡고 갈 수 있는 동력은 단체가 아니고 한 사람이다. 이것은 무수한 투쟁현장의 지킴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성경말씀은 '임금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이다. 예수가 성전에서 기득권세력과 여러 가지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데 그중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 내용이 부자연스럽다. 임금은 채신머리 깎이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시라고 신하인 손님들에게 간곡하게 청한다. 매우 저자세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니까. 진짜 이상한 것은 초대받은 손님들이다.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3절),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5,6절)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초대받은 사람들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다. 처음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찼을 것이다. 그들의 극단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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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예복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회개라고 하셨다. 그림은 '카나의 혼인잔치'(제라드 데이비드 작, 1500년). | | |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도 계속 일어난다. 임금이 노한다. 그래서 초대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살인자에 해당하는 심판을 한다. 군대를 보내서 그들을 죽이고, 그들 도시를 불살라 버린다. 이런 공포의 혼인잔치가 다 있나 싶다. 정치적으로 풀면 좋았을 텐데, 무력으로 응징하다니. 여하튼 임금은 아들 혼인잔치가 경사스러워야 한다는 대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대했던 사람들을 완전히 작살낸다.
그리고 임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된다.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하라고 한다. 초대손님 대상을 싹 바꿔 버렸다.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혼인잔치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하지만 돌발상황은 계속된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 묻는다. "이 사람아,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라고. 아무나 데려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추궁을 하다니! 임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지라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게 하라고 명했다.
이 혼인잔치 이야기가 은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라면, 이 혼인잔치는 공포살벌의 썰렁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손님들은 또 무슨 빌미로 임금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 몰라서 가시방석이었을 테니 말이다.
도대체 이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런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임금의 이상한 행동, 아들의 혼인잔치를 망치면서까지 초대를 거절한 사람,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이 비유는 무슨 뜻인가?
기원후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시가지와 성전이 불에 타 없어진다.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 최후 보루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7절) 이 말씀 그대로이다.
임금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똑바른 세상, 평등세상을 유지하기를 바라서,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주고, 내 말을 잘 들으라고 끊임없이 예언자를 보냈다. 야웨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라고. 야웨신앙으로 돌아오라고. 그러나 그들은 회개는커녕, 그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가두고 모욕하고 때리고 죽였다. 예언자가 이 지경이니, 민중들은 오죽하겠는가! 혼인잔치로 상징된 야웨와 이스라엘 간의 계약은 진즉 깨졌다. 이스라엘이 야웨를 졸로 보는데, 야웨라고 이런 백성을 향해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이상한 행동은 끝까지 배역으로 일관하는 백성에 대한 분노이다. 더는 이스라엘을 건사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성전은 무너졌고, 기득권인 성전세력도 함께 멸망했다.
이런 전 과정을 예수공동체도 모두 똑같이 목격했다. 구체제가 어떻게 무너졌는가를, 하나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네 종교틀 안에서 안주하려는 집단의 끝이 어떤가를.
임금이 전면적으로 대상을 바꾼 두 번째 손님들은 초대장이 유대 성전과 율법집단으로부터 예수공동체로 옮겨 온 것을 말한다. 임금은 자기를 대실망시킨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람들은 율법이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한 사람들이다. 구체제에서 변두리로 밀려났던 사람들이다. 주로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들이다. 구체제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율법의 정결례대로 하자면, 이런 사람들이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뜻밖에 이들도 초대손님이 됐다. 이들이 구체제의 기준에 따라 선한가 악한가는 이제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도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거다. 이 사람이 입지 않은 혼인 예복은 무엇을 말하나? 구체제 사람들이 예언자를 학대하며 하나님말씀을 무시했다면, 새로운 초대를 받은 사람 중,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이 새로운 질서에 맞는 마음가짐이 안 돼 있는 사람이다. 어떤 마음가짐인가?
새 질서로 단장한 잔치자리에도 그 자리에 걸맞은 삶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려는 마음의 준비와 그에 따른 실천이다. 초대에 부합하게 처신하는 것은 자기의 운명을 좌우하는 매우 결정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초대손님은 전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평등세상을 구현하라는 야웨 말씀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배반했는지, 그 결과 그들이 어떤 종말을 맞이하였는지, 어째서 초대손님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진지한 믿음과 그 세상에 자신을 맞추려는 돌아봄 곧 회개가 필수이다. 구체제 사람들의 믿음과 회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식이었다. 희생양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고 자신들은 눈곱만치도 애통이 없었다. 성전은 영원히 자기들과 함께할 것이라는 깊은 착각에 빠졌다. 새 손님이 같은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바로 그런 준비와 태도가 안 돼 있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애통은 새 세상에 꼭 필요한 덕목이다. 구체제 사람들이 외면한 애통을 새질서 사람들은 사수해야 한다. 죄성에서는 그들이나 이들이나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이다. 결론인즉 이 비유말씀의 대상은 신체제에 들어왔으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향한다. 그것은 믿음도 믿음이지만, 애통과 회개가 부재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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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바깥으로 내던져진 사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심판당해 떨려난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그들은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2)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 25:30) 이를 간다는 것은 애통하는 몸짓이 아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하고 복수를 벼르는 몸짓이다. 심판과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애통은 없다. 본인도 비극이겠지만, 보는 우리도 비극이다.
우리 세상은 잘난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다. 그래서인가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자신과 세상을 구하는 것은 잘남이 아니다. 애통이다. 우리 모두 애통하자. 죄성으로 가득찬 자신에 대하여. 불의가 한계에 달한 세상에 대하여. 애통이 우리를 구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