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뉴스민은 68주기 10월항쟁을 맞아 '10월항쟁행사위원회'가 벌이는 행사와 10월항쟁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리는 기사를 5회 연재하고자 한다. 그 첫번째는 23일 열린 학술토론회 '전평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에 관한 기사다. 다음 연재는 10월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불리운 노래 '인민항쟁가'와 관련한 이야기다.
1946년 9월 전평 총파업과 10월항쟁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50여 명의 참가자는 역사를 돌아보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10월항쟁 정신계승을 다짐했다.
‘68주기10월항쟁정신계승및희생자추모제행사위원회’가 주최하고 민주노총대구본부 10월항쟁특별위원회와 이일재선생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3일 저녁 7시 경북대병원 10층 세미나실에서 ‘10월항쟁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안태정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이 발표자로 나섰고, 손호만 전교조 대구지부 참교육실장, 이재영 공무원노조 대구경북본부 남구지부장, 이재식 민주노총 대구본부 수석부본부장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안태정 연구원은 1946년 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을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미제국주의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저항투쟁”이라며 항쟁의 실패 원인을 중심으로 발표했다.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의 배경과 전개, 역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발표문 원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발표문: 전평과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대구에서는 1946년 9월 24일부터 10월 16일까지 전평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후 대구역전에 설치된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공권력에 의해 파괴됐고, 식량배급투쟁 등이 벌어지며 노동자들의 파업은 다른 대중들과 결합했다. 10월 2일 대구인민은 대구경찰서를 무장해제했고, 미군정이 계엄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3일부터 대구인민항쟁이 퍼져 경북지역까지 확대됐다. 그해 12월까지 지역별로 항쟁이 지속했으나, 이후 공권력에 의해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10월인민항쟁은 주류 역사에서 ‘10월 폭동’으로 평가절하당한다.
안태정 연구원은 “10월인민항쟁은 일본제국주의 지배계급의 지배하에서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 이들이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의 지배하에서도 지위를 유지하면서 노동자 민중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에서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에 반대하고, 이를 응징하도록 하는 ‘노동자 민중을 위한’ 정치권력을 인민위원회에 부여하려 한 것”으로 항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안 연구원은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은 38선 이남지역에 대한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의 점령과 지배정책의 본질이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지배체제 유지와 강화에 있었음을 폭로했다”는 점을 첫 번째 성과로 꼽았다.
이어 “노동자 민중이 억압과 착취체제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저항정신과 투쟁의지를 드러내고 해방을 갈망한 점, 자본계급의 국가기구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며 지주적·자본주의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새로운 국가 권력관계의 수립을 원했다는 점”을 성과로 꼽으며 “38선 이남지역뿐만 아니라 38선 이북지역까지도 몽땅 차지하려는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의 지배정책을 좌절시켰다”고 말했다.
10월인민항쟁의 실패 원인으로 안태정 연구원은 ▲전평 등의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단계론적인 사회변혁 노선 ▲인민항쟁의 연합 부족과 분열 ▲인민들의 이념지형과 실천행동의 괴리 등을 꼽았다.
안태정 연구원은 “전평 등이 인민정권을 수립하는 방도는 두 가지였다.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에 참여해 미소 협조를 얻어 인민정권을 수립하는 방식과 대중투쟁의 압력을 통해 미국제국주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받는 방식이었다”며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의회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인 것’이었다. 노동자 민중의 주체성을 억제하려고 했다. 10월인민항쟁이 일어난 것도 전평 등의 계획과 달리 인민들이 나서 투쟁하게 됐다”고 말했다.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의 실패와 역사적 교훈과 관련해 토론이 이어졌다.
손호만 참교육실장은 “10월항쟁은 9월 노동자들의 총파업까지 포함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10월 1일 인민들의 항쟁이 퍼져나가자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은 동떨어진 것처럼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며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을 종합적으로 되짚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10월항쟁 이후 전평에 대한 빨갱이 공세가 이어지자 10월항쟁을 쌀배급 문제만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현재 대구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대한 자괴감이 크다 보니 10월인민항쟁에서 ‘대구’만 부각시키기도 한다”며 “10월인민항쟁은 쌀배급 문제, 그리고 대구만의 항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전 민중의 의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재영 지부장은 “9월총파업이 항쟁으로 크게 번진 곳은 대구경북지역이다. 대구의 특수한 환경이 있지 않았겠느냐”며 “대구만큼은 좌우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열망이 많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활동을 많이 했다”며 “대구경북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안태정 연구원은 “당시 대구에서 좌우합작이 잘됐다는 점을 좋게 볼 수만은 없다. 좌우합작이 좌익 내부의 분열을 만들기도 했고, 결국에는 피지배계급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억제시킨 역할을 했다. 이는 좌우합작이 10월항쟁에 거부당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반박했다.
이재식 수석부본부장은 “68년 전 전평이 외쳤던 주장이 지금 민주노총의 주장보다 진보적이다. 조합원의 한 명으로 부끄럽기도 하다”며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이 던져준 교훈을 짚었다.
이 수석부본부장은 “10월항쟁 당시 공장 안 노동자와 공장 밖 노동자를 구분하지 않고, 여러 민중의 권리를 위해 함께 투쟁했다. 전평의 후예를 자청하는 민주노총이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경제투쟁에만 묻히지 않고, 민주노총이 세상을 바꾸는 정치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10월항쟁행사위원회는 내달 1일에는 추모제를 포함해 여러 행사를 진행한다. 오후 2시 국채보상공원 세미나실에서 ‘지역작가 초청 항쟁의 문학 형상화’ 세미나를 열고, 오후 6시부터 228기념공원 청소년광장에서 희생자 추모제를 진행한 후 10월 문학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