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7월 15일 '예수읽기 54'를 쓴 이후 꼭 두 달 동안 부득이하게 글쓰기를 못했다. 알다시피 2014년 7월 21일 꼭두새벽,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345kv 송전탑 건설현장 입구인 삼평리 평화공원을 한전과 경찰 수백 명이 펜스를 치고 기습공사를 벌였다.
그날 이후 '청도345kv송전탑반대대책위' 공동대표인 필자는 연대자들과 함께 두 달 동안 삼평리에 상주하며 공사저지 투쟁을 벌였다. 할매들과 지킴이들은 꿋꿋하게 경찰과 한전에 맞서 싸웠다. 그렇게 매일매일 긴장과 격렬한 충돌 속에서 지내느라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었다. 수와 물리력의 현저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견뎠고, 그 긴 날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나버렸다.
두 달여 투쟁하는 동안, 모두 32명의 연행자가 발생하고, 그 생난리 속에도 한전은 경찰의 비호 아래 철탑을 세우고, 추석 다음 날에는 청도경찰서장이 한전과 결탁하여 할매들에게 돈봉투를 살포하여 직위해제되고, 9월 15일에는 경찰서장 집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는 등, 무수한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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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전의 송전탑 공사 재개 이후 삼평리 주민들과 대책위는 평화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무너진 장승을 다시 세우고 있는 이들. [사진=뉴스민 자료사진] |  | |
비록 철탑은 섰지만, 할매들과 대책위는 다음 투쟁을 준비하며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다행히 현장상황이 국면전환되어 필자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두 달 동안 '백목사의 예수읽기'를 연재하지 못한 점에 대해 뉴스민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이제 복음말씀을 전하겠다.
유대인들을 집단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저자는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럴 때만 적을 용서하라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용서의 전제조건으로 가해자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악을 철저히 청산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그래서인가, 매주 <한겨레> 토요판에서 책 한 권을 소개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9월 13일 『용서라는 고통』이란 책을 소개했다. 제목에서 말하듯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는 요지이다. 정희진 씨는 이 책 소감으로 용서의 어려움, 불가능성을 말했다.
고통의 현장을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하는 필자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가해자의 범죄를 정당화해주고 은폐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은 피해자가 들으면 몸서리칠, 감당하기 힘든 말인 용서에 대해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한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는 큰 맘 먹고 너그럽게 말한 거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더 뜻밖이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산술적으로 490번이 아니라 용서의 끝없음을 말한다. 무한정 용서하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의 말, 『용서의 고통』등에서 말하듯 용서의 불가능성과 오늘 복음말씀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프리모 레비도 권력이나 자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라도 용서를 하지 못하면 그들 역시 하늘 아버지께 용서받지 못하는 운명에 떨어지는 것인가?
용서할 수 없는 현실과 용서하라는 복음말씀 간의 충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마태교회의 특별한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은 마태교회가 직면한 사정을 풀기 위해 쓰여졌다. 마태교회가 직면한 사정은 교회 안에서 발생한 죄의 문제다. 그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매우 심각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용서와 화해에 대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이런 말씀은 마태의 창작이 아니다. 바로 자기교회에서 생긴 어떤 사건이 구체적인 소재가 됐을 게 분명하다. 또 마태 6장에는 유명한 주기도문 안에 용서의 기도가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태 6:12) 그런데 주기도가 끝나자마자 또 용서를 말씀한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6:15 말씀은 오늘 본문 끝말씀인 18장 35절 말씀과 거의 유사하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 강조하는 것은 마태교회에서 용서가 매우 중요한 현안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용서의 대상과 적용범위를 사적관계를 넘어서 사회전반으로 확장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용서를 전방위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점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국가권력과 자본이 저지르는 범죄를 종교적 개념인 용서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은 권력과 자본이 저지르는 악행에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하라는 것은 권력과 자본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절망의 구덩이로 더욱 몰아넣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무치게 바라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인데, 정의가 실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말하는 용서는 무엇인가? 어떤 뜻인가? 어째서 마태는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는 것인가?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태 18:20) 마태교회는 두세 사람, 매우 적은 소수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이다. 마태교회가 처한 환경과 상황은 지금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가 절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교회나 목사가 마음에 안 들면 단칼에 잘라버린다. 게다가 교회 안 다녀도 누가 잡아가지 않는다. 또 교회가 아니라도 의지처가 많다. 가족, 친지, 친구가 있다. 또 갈 데가 많다. 다른 교회를 갈 수도 있고,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취미활동을 할 수도 있고, 홀로 수양할 수도 있고...
그런데 마태교회는 어떤가? 그들은 유대교 율법과 회당체제에서 변두리 사람들이다. 회당에서 나오면서 유대교 체제에서 누려온 삶의 자리에서 소외당했다. 어쩌면 개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의지처인 가족 친지 친구에게서도 단절돼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태교회는 유대교 세상에서 고립된 그들에게 유일한 의지처이다. 그러므로 교회마저 끊어지면 갈 데가 없어지는 사람들이다. 옛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렇다면, 세상에서 고립된, 매우 적은 수가 모이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죄를 지고 반목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못 가 깨진다. 모든 것을 결단하고 희생하고 입문했지만, 교회 안에서 새 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안에서 생기는 갈등과 불편함은 사람 뼈를 녹이고 영혼이 시드는 고통이다.
그러니 그 제한적 공간에서 서로 간에 죄를 지으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밖에 없다. 용서 없이 비정하다면 마태교회는 깨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저 교회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바친 그들 자신의 생의 의미를 잃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으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비유이야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빚진 사람이 채무 때문에 취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애원이다.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은 빚진 자, 곧 죄지은 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용서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애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원은커녕, 되레 적반하장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사회적 무기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용서를 공동체 단위를 넘어서 전 사회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경솔하거나 오류일 위험이 더 크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용서가 맺어주는 형제사랑이다. 이것은 사람의 의지에서 나오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운으로만 가능하다. 독자들의 사람살이가 하늘의 감동으로 서로 용서하고 형제애로 가득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