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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4년08월25일 16시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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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17)
<밀양을 살다>, 사람은 울력으로 산다

빨간 주부 lotte2102@naver.com

그곳에 사는 이들에겐 전쟁터인 '밀양'을 남의 일인 듯 바라보기만 하다가 겉으론 태연한 척 알량한 후원금 몇 푼으로 자위했던 자신이 내심으론 무척 부끄러웠다. 전국 모든 싸움의 현장에 참석할 수 없지만, 지역에서 가까운 밀양은 희망버스가 몇 차례 운행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미력하나마 함께 하는 뜻을 보탤 수 있었다. 그러나 언론에 비치는 격렬한 몸싸움과 경찰의 현장 진압이 무서워 꽁무니를 뺐다.

그러던 차에 회비 납부만 충실한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인 내게 고맙게도 단체 카톡방에 초대하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송전탑 싸움의 현장에 점심 배식을 함께할 회원을 요청하는 초대였다. 송전탑 싸움의 최전선에는 평생 농사일로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께서 생업인 농사도 뒤로 한 채 앞장 서 계신다. 그곳에는 당신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다는 연대의 힘과 뜻을 나누는 이들도 있다. 연로하신 할머니들께서 대치 현장에서 싸우면서 최소 50여 명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다. 그래서 청도에서 가까운 대구 지역 시민단체에서 현장의 끼니를 마련하는 수고를 덜어드리기로 했단다. 순번을 짜서 돌아가며 찬을 준비해 배달하기로 했단다. 배식하고 설거지까지 마치는 일이다. 현장에 상주하며 싸우는 이들에 비하면 수고랄 것도 없다.

얼마 전에 읽은 밀양송전탑 싸움의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15편의 밀양 아리랑 <밀양을 살다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 봄>에 보면, 할머니들께서 한전 직원, 경찰들과 싸우면서 밀양을 찾아온 연대자들을 위해 끼니를 챙기는 대목이 나온다. 당장 일거리가 밀린 농사일이 걱정인데도 멀리서 찾아온 그들을 위해 밥상을 준비하셨다는 할머니들의 그 마음이 사무쳤다. 일생을 바쳐 일군 생존의 터전을 지키는 싸움 중에도 그분들은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달려온 지지자들에게 따뜻한 할머니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책을 읽고 밀양 할머니들께 고마움이 담긴 연대의 밥을 대접하고픈 바람이 간절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더니, 밀양 할머니들을 대신해 청도 할머니들께 따끈한 점심 한 끼 드릴 기회가 왔던 것이다.

<밀양을 살다>는 단지 밀양 송전탑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책이 아니다. 거기엔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은폐된 적나라한 모순과 다양한 이유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막내며느리로서 갖은 고생을 겪고 특별히 혜택받은 것도 없는 한 할머니는 '고향의 농토를 지켜라'는 시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송전탑 싸움에 함께하신다. 가부장제에 순종적이었던 할머니의 삶과 '시아버지'란 생존했던 가부장의 인정은 할머니가 송전탑으로 상징되는 최고의 가부장제인 자본의 이익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공권력, 자본과 싸우는 까닭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생애를 걸고 지켜왔던 농토에 대한 애정, 새 삶의 기회를 준 자연에 대한 고마움, 농군의 경험으로 터득한 삶의 순리 등 밀양을 사는 목적은 제각각 이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고 깨달은 점은 송전탑과 원전의 관계, 공권력의 횡포, 원전마피아의 탐욕이 아니다. 평균연령 일흔의 그/녀들의 삶에 녹아있는 인생의 공시성이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우리 삶은 당대와 외따로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을 구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첫 번째 인터뷰 할머니의 인생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모진 질곡의 삶을 건너오셨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싸우신다. '전쟁터'라고 이름붙인 밀양에서 그들은 '울력'으로 사는 사람살이의 가장 큰 덕목을 자주 이야기 한다. 울력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또는 그런 힘'이다. 농사짓는 일이 그렇고, 이웃과 사는 일이 그렇고, 싸우는 일도 울력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삶의 이치를 <밀양을 살다>에서 배웠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명목으로 이만큼 충분한 것은 없다. 통신 시설이 발달한 이 시대에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울력으로 산다는 이치를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소설과 달리 인터뷰집은 살아있는 입말을 읽음으로써 팔딱팔딱 숨 쉬는 삶의 비릿함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유한한데 앎은 무한하다는 장자의 구절처럼 무한한 앎을 쫓으면 자칫 유한한 삶이 망가질 수 있다. 책을 인생의 빛이 아니라 자주 도피처로 여겼던 내게 <밀양을 살다>와 같은 책은 앎의 추구가 아니라 유한한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서 책 읽는 행위를 반성케 했다.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사람은 울력으로 산다. 밀양 할머니들의 아리랑을 읽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던 내게 이렇게 비가시적인 울력의 힘이 든든하게 미쳤던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송전탑 건설은 진행 중이었다. 할머니들께선 공사 진입로를 향하는 레미콘 차량을 막아서는 몸짓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하셨다. 그러던 중 전날 몇몇 할머니께서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은 건설현장의 입구에 있는 논 옆의 임시천막이다. 농성장은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도로 가에 있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연대자들은 그곳에서 노숙에 가까운 침식을 해결한다. 그곳에 있으니, 오 분이 멀다하고 소음을 일으키며 공사현장을 오가는 산불방제용 헬리콥터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공사 현장부터 소음이 마을 전체를 지배하는 데, 송전탑이 세워지면 주변에서 가축 사육이 힘들고 농사짓기도 힘들다는 것은 당진 같은 곳의 예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밀양 할머니들도 그랬지만 중요한 것은 연대의 정신이다. 삼평리의 젊은 부녀회장 쌍둥이 엄마가 <삼평리에 평화를 / 박중엽 외 2인 공저 / 한티재>이란 책의 인터뷰에서 밝히대로 ‘연대도 품앗이’다. 거대 자본과 공권력을 상대하는 싸움에서 항상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세상이 좀 더 건강해지는 것은 밀양과 청도 할머니들처럼 질긴 싸움을 이어가며, ‘가만히’ 안 있는 것이다. 밀양과 청도는 거의 모든 삶의 조건을 개인에게 짐 지우는 세상에서 <더불어 함께> 라는 당연한 인간 생존의 가치를 우리에게 재삼 확인시킨다.
 

빨간 주부 lotte21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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