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의 운명인 새민족교회 이야기를 좀 하겠다. 때는 27년 전이다. 그때 나는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깊은 회의 속에서 방황할 때였다. 신앙전향 후, 모든 것이 서먹해진 모교회에서 이탈한 후,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렸으나,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산란해진 내 영혼은 계속 신산할 뿐이었다. 대안을 찾지 못한 나에게 교회는 더 이상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내 신앙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깊은 회의 속에서 간당간당했다. 그러던 중,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마실삼아 찾아간 교회가 갓 생긴 새민족교회다. 새민족교회가 특별히 어떤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내 신앙여정은 지금까지 새민족교회와 동일시됐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하는 거다.
7월 10일, 제주강정 기독교대책위원회 일로 서울에 갔다가, 저녁에는 대한문 앞에서, 세월호 참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촛불교회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오랜만에 서울 새민족교회 장로님과 교우들을 만났다. 근황을 나누다가 옛날 새민족교회 이야기가 나왔다. 1986년에 창립한 새민족교회 역사 중, 중대한 전환점이 있었다. 1992년에 새민족교회와 다함교회가 통합한 일이다. 다함교회는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온 젊은 사람들이 세운 교회인데, 1992년에 새민족교회와 한 식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분이 말하기를 초창기 출신 중에 새민족교회에 남은 사람은 권사님 한 분과 우리 가족뿐이라고 했다. 그 외는 다함교회 출신 연고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결론은 의식과 신심의 차이였다. 새민족교회 탄생 자체가 시대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차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전두환 군사독재에 분노한 당시 시대분위기와 맞물려서 교회에는 의식 있는 청년학생들이 많이 왔다. 그들은 교회를 자기의식을 분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교회에 걸맞은 신심보다는 자신의 의식구현이 목적일 정도로 이념에 충실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회는 고충이 많았다. 교회를 구성하는 세대가 대부분 청년학생이다 보니, 살림살이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 어려움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담임목사는 결국 생활고에 시달려서 교회를 사임하는 아픔도 있었다. 교회가 가장 어려웠을 때는 임차료를 내지 못해서 보증금을 절반 이상 까먹는 지경까지 갔었다. 그 사이 의식으로 똘똘 뭉친 청년학생들은 진즉 교회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물질기반이 약한 약간 명의 교우들뿐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건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 뒤 새민족교회는 기사회생했다.
한편, 한 식구가 된 다함교회는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참된 교회를 만들어보자는 열망이 있고, 비교적 신심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삶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으로 있지만, 이념이나 의식이 우선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자기의식을 실현할 다른 공간을 찾기 마련이므로 교회가 자신에게 그다지 비중이 없었다. 바로 이런 차이, 교회에 나온 동기가 의식이냐, 신심이냐 하는 차이에 따라, 초창기 새민족교회 출신들은 다 떠나고 다함 출신 교인들이 교회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라는 진단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공동체와 한몸이 되는 것은 신심여부가 좌우한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목회하는 대구새민족교회는 여기에다 또 하나의 조건이 추가된다. 대구새민족교회는 대구에서 무신성 그룹과 맹신성 그룹 사이에 있다. 무신성 그룹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가치를 우선하여 신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다. 맹목성 그룹은 기존교회의 신앙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범주 안에서 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대구새민족교회는 무신성과 맹목성 중간에 있기 때문에, 대구라는 척박한 환경과 맞물려서 성장에는 많이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전망 없는 목회를 계속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엄습할 때도 있지만, 최근에 본회퍼의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복종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우리 앞에 닥치는 실패와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면, 이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공을 하나님이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길이었고, 그 길을 걸으려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에릭 메택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역, 포이에마, 521쪽)
사설이 길었지만, 오늘 성경말씀인 '씨 뿌리는 비유'의 배경이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가 이 비유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사에 관해서는 농부가 가장 잘 안다. 게다가 지금 예수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면서 쓸쓸한 감정이 생겼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모두 전직 농부들이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땅일지라도 자작농을 하거나 남의 땅을 부쳐 먹는 소작을 하거나, 얼마 전까지 농사가 생의 전부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득권의 수탈과 학대 때문에 대부분 빚을 지고, 땅을 잃고, 떠돌이가 된, 땅을 빼앗긴 암하레츠, 땅의 백성으로 전락했다. 땅 이야기가 나오면 옛날 생각이 나서 급격히 우울모드가 될 게 분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모를 리 없는 예수가 이 비유말씀을 하실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것은 무엇인가? 예수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지금 '함께 가는 길'에 대한 상황공유를 위해서, 또 공동의 신앙다짐을 위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도입부 말씀은 특이하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서 있었다"(마태 13:2) 무엇이 특이한가? 이 사람들이 원래 있던 자리는 회당이다. 회당이 정상이라면, 예수와 무리들은 회당에서 하나님말씀을 반포하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회당에서 쫓겨나서 바닷가로 밀려났다. 즉 그들은 구체제의 상징인 회당 대신 새로운 대안공간인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들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은 적지 않았다. 오늘 성경말씀 바로 앞부분(12:46-50)은 예수가 가족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뿐인가? 따르는 무리들도 땅을 빼앗긴 아픔뿐만 아니라, 전통가치인 율법과 그 율법체제에서 맺어진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이탈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기웃거리다가 맛도 못 보고 떠난 사람, 입문은 했지만, 시련이 닥치자 금세 떠난 버린 사람, 끝까지 같이 갈 것처럼 보였는데, 과거체제 미련을 못 끊고 다시 돌아간 사람 등등.
우리도 살면서 체험하다시피 어떤 정의롭고 선한 가치가 있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은 소수다. 그 경험이 바로 씨 뿌리는 땅의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씨가 떨어지는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이들이 겪은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일들, 특히 각양각색 사람들에 대한 경험이 하나하나 각인돼서 씨 이야기에 담긴 것이다.
성경말씀에 나온 대로, 길가와 돌짝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결실을 보지 못한다. 새가 쪼아먹었고, 해에 타버렸고, 가시덤불이 막아버렸다. 농부는 헛수고만 했다. 헛수고의 고통을 아는가? 구원받기를 바라서, 함께 하나님나라의 동역자가 되기를 바라서, 아름다운 예수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애쓴 수고가 아무 보람 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됐을 때, 예수와 그 무리가 느낀 상실감은 컸다. 우리도 비슷한 허탈감을 겪는다. "아, 안 되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엄습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실패와 좌절 때문에 씨 뿌리기를 중단해야 하는가? 악마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자! 봐, 아무 보람 없잖아, 그런 헛수고를 뭐하러 해, 인간사 부질없어, 그 에너지를 너 좋은 데 써" 하면서 마음을 충동한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일은 농부를 기쁘게 하는 땅이 남아 있는 거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런 결실은 정상적인 수확이라고 한다. 요는 사람이 맺는 결실이다. 농산물은 그 소출이 눈에 보이는 결과로 확실하게 나타나지만, 사람의 경우는 그 결실을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거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13:23)고 했다. 열매의 내용은 무엇인가?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면 좋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어디 그런가? 오히려 남들에게 부러움과 감탄을 자아내는 성공이 결국 타락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좌절과 실패로 보이는 일이 후일에는 성공의 밑거름으로 드러나는 일도 많다.
신앙적인 언어로 고백하자면, 여기에도 인간의 이성으로 단칼에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작용한다. 그렇다면 말씀을 깨달음이란 사람이 하는 일의 유한성을 알고 겸손하게 처신하며, 정의를 구하며 하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리라. 실상 고백하자면, 사람이 얻는 가장 큰 결실은 하늘에서 오는 거다. 무신성이든 맹목성이든, 사람들이여, 너무 자기 의에 기대지 마시라. 우리 위에 하늘이 있음을 의식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