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으로 2014년 6월 8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강림절이 끝나면 한 해도 끝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는 대림절로 넘어간다. 일 년 중 절반가량이 성령강림절인 것을 보면 이 절기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령강림절의 요체인 성령 즉 하늘의 기운, 정의롭고 거룩한 기운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매우 핵심적인 하늘의 은사임을 보여준다. 오늘은 이 거룩한 기운이 이 어둠의 세상에서 정의롭고 사람다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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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은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 행정대집행 철거에 적극 앞장섰다. | | |
6월 11일(수) 새벽, 정부는 밀양 송전탑반대 투쟁의 최전선인 네 개의 움막을 폭력적으로 철거하는 행정대집행을 감행했다. 견찰 이천여명과 한전과 용역 천여 명을 동원하여 129번, 127번, 115번, 105번 움막들을 차례로 침탈했다. 견찰의 폭력에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에게 송전탑을 반대하는 밀양주민들과 연대자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오직 섬멸해야 하는 적에 불과했다. 공무원이 하게 돼 있는 행정대집행 법을 무시하고 견찰들이 직접 움막철거를 했다. 할매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목에 쇠사슬을 묶고 저항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주민들에 대한 안전조치나 인권보호는 아예 없었다. 쇠사슬에 절단기를 들이밀었고, 남자견찰들은 벌거벗은 할매들을 사정없이 들처메고, 질질 끌었다. 연대한 수녀들의 정절과 순결의 상징인 머릿수건을 함부로 벗겼고, 몸을 짓밟고 부러뜨렸다. 인권변호사들이 변론권을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되레 변호사들을 고착했다. 인권침해방지를 목적으로 출동한 국가인권위 직원들은 그저 멀뚱히 구경만 했다. 6월 11일 밀양을 덮친 행정대집행은 다시 한 번 이 나라 권력이 행사하는 공권력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했다.
악한 권력은 반대자들의 투쟁을 잠재우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더 극악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폭력을 겪으면, 공포나 트라우마에 시달려서 투쟁을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런 극심한 폭력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어났고 다시 모였다.
6월 14일(토) 밀양 세 마을에서 벌어진 촛불문화제는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새롭게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주민들은 '시즌 2'를 준비하여 끝까지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이며, 반드시 송전탑 건설을 중단시키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한 번의 전투에서 밀렸지만,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그 결의를 모아서 6월 16일(월)에는 밀양의 할매, 주민들과 청도 삼평리 할매들이 버스 두 대로 서울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경찰청 앞에서는 행정대집행을 빙자한 견찰들의 만행을 풍자하여 이성한 경찰청장을 상대로 국민대집행 영장을 발부했다. 진압을 마친 여경들이 헤헤거리며 V자를 그리며 기념촬영한 것을 꾸짖는 뜻으로 모든 참석자도 똑같이 승리를 외치며 V자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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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월 16일 밀양, 청도 주민들은 서울로 상경해 경찰청과 한전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백창욱 | | |
이어서 한전본사로 장소를 옮긴 상경투쟁단은 각처에서 모인 연대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모형송전탑을 호미로 캐서 부숴 버리고, 재벌기업들에게 값싼 전기공급을 하기 위해, 적자를 감수하는 한전을 안쓰럽게 여겨서,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십원짜리 동전을 한전 정문에 기부 투사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숨 쉬는 것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는 한전을 성토함은 물론이다.
촛불문화제에, 상경투쟁단에 동행한 필자는 이분들이 굴하지 않고 투철한 투쟁의지를 다지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면서, 저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를 생각했다. 송전탑반대 싸움은 탈핵으로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대, 핵마피아라는 소수집단의 탐욕을 더 이상 봐 줄 수 없다는 하늘의 뜻이, 이 시대 남은 사람들의 양심과 어우러져 일어나는 거룩한 기운의 작용이라는 감동을 받았다.
오늘 성경말씀 첫 절은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고 서술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미건조한 담담한 말이지만, 이들이 바로 직전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당사자 제자들은 매우 특별한 감회에 젖었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열한 제자라는 숫자가 이들이 겪은 변고를 암시한다. 왜 열한 명인가? 예수 제자는 열두 명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결과 열한 명이 됐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이 유다와 달리 떳떳한 것도 아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 26:56) 유다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제자들도 오십보 백보이다. 이처럼 열한 제자에게는 부끄러운 상처와 아픔이 그대로 자기들 가슴과 영혼에 남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비겁하고 지극히 나약한 인간인 것을 뼈저리게 겪었지만, 그것은 자신을 자학하거나 숨지 않았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예수 앞에 나왔다. 다함께 모였다.
열한 제자가 모인 갈릴리에 주목하자. 이 장소는 예수와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마지막 이별장소가 베다니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다니까지 데리고 갔다"(누가 24:50)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이다. 갈릴리와는 지리적으로 정반대이다. 하나는 이스라엘 북쪽이고, 하나는 이스라엘 남쪽이다. 어째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별장소가 현저히 다른가? 예수와 제자들이 순간이동을 해서, 두 군데서 시간차 연출을 한 것인가? 진짜 작별장소는 어디인가? 알 수 없다.
이것만 보더라도 예수의 승천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기보다는 초기교회 공동체들의 신앙고백임을 알 수 있다. 마태는 복음서 결말을 푸는 열쇳말로 갈릴리를 중시했고, 누가는 베다니 또는 예루살렘을 중시했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어째서 갈릴리에 모였나? 처음 예수운동을 시작한 곳이 갈릴리이다. 예수께서 복음활동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것은 알겠는데, 부활 이후 다시 갈릴리에 모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예수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자고 한 것인가?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이었다.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마태 10:5,6)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의 복음을 거부했다. 게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마태공동체는 결단을 내렸다. 이제 그들의 태생적 한계인 이스라엘을 벗어나기로.
벗어나기로 한 그 새로운 결단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선언하는 게 가장 좋은가? 바로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때에, 또 복음활동을 처음 시작한 갈릴리이다. 부활은 복음전파가 유대라는 경계를 넘어서기에 매우 훌륭한 전환점이다. 또 가난과 소외의 땅이며 이방의 갈릴리야말로 새로운 선언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다. "(유대인을 넘어)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으라"(마태 28:19)는 말씀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전권을 받았다"고 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삼고,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일의 원인자가 어떤 분인가가 중요하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제일 원인자는 신적존재인 아우구스투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 세속의 믿음을 거부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전권'을 받은 예수가 제일 원인자라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했다. 로마황제가 들으면 대경실색할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개의치 않고 예수의 권세에 의지하여, 로마신민이 아닌 하나님나라 신민을 만들어나가자고 결의했다.
예수시대나 지금 우리나 험난한 세상을 살기는 매일반이다. 민중이 저절로 살기 좋았던 시절은 결코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싸워서 획득한 것이다. 불의한 권력은 폭력으로 공포를 일으켜서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체념하고 순응하도록 조장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밀양 행정대집행에서 정부가 보여준 추악한 공권력처럼.
그러나 권력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예수의 제자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예수운동을 더욱 활짝 펼치자고 결의했다. 밀양주민들은 폭력에 굴복하기는커녕, 다시 뜻을 세웠다. '시즌 2'를 결의하며 반격투쟁에 나섰다.
어떻게 이런 정의를 향한 용기가 가능한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하늘의 영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포악한 국가폭력이든, 사악한 자본마피아이든 간에 그 어둠의 기운에 눌리지 않도록, 정의롭고 거룩한 기운, 생명평화세상의 기운이 덮쳤기 때문이다. 독자들께도 성령의 감동이 쓰나미처럼 휘몰아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