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의 민주주의 정신과 세월호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외침이 청와대 턱 밑에서 터져 나왔다. 지난 5월 9일, 세월호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청한 이후 시민들의 추모시위 중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열린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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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신한 만인대회 참가자를 질질 끌며 연행하는 경찰들 [사진/ 김용욱 기자] | | |
10일 저녁 9시 30분 경, ‘6.10 만인대회’ 참가를 위해 집결한 100여 명의 시민들은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서 참가자의 절반이 넘는 70 여명이 연행될 때까지 “세월호를 잊지 말자”, “이윤보다 인간이다”, “우리가 국민이고, 청와대로 가겠다”를 외치며 자정이 넘도록 저항했다.
당초 이날 ‘만인대회’는 저녁 7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1부 사전마당을 마친 후 저녁 8시 삼청로를 따라 올라가 주한 브라질 대사관 앞에서 자유로운 형식의 시민발언과 문화제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오후 6시경 경찰 500여명과 버스 30여 대를 동원, 동십자각 도로 양 인도를 전면 봉쇄해 통행을 막았다. 현대미술관 서울관 정문 앞 인도는 경찰 400여명을 2m~3m 간격으로 촘촘히 배치하는 등 ‘만인대회’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총력을 동원했다.
‘만인대회’ 1부는 저녁 7시 45분 경, 동십자각 우측 출판문화회관 앞 인도에서 열렸지만 종로경찰서는 대회 시작 20분 만에 속전속결로 3차 해산명령까지 내렸다. 3차 해산명령 직후 시민들은 안국역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어 ‘만인대회’ 주최 측은 계획을 수정해, 삼청동 주민센터 인근 새마을금고 앞으로 ‘만인대회’ 2부 진행을 알렸다. 1부에서 자진해산한 시민들은 개별적으로 9시 20분께 2부 장소에 집결했다. 2부에 모인 100여 명의 시민들 중 대다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과 청년들이었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경찰은 대회 참가자들이 기습적으로 구호를 외치자마자 거세게 인도로 몰아세웠다. 이어 10시 10분 경, 1차 충돌이 발생했고 한신대 최 모 학생을 시작으로 연행이 이어졌다. ‘가만히 있으라’ 행진과 ‘6.10 만인대회’를 공동제안한 용혜인 씨는 “경찰들의 대응이 (지난 5월 17일) 동화면세점 앞에서 100여명을 연행했을 당시보다 더 격해진 것 같다”며 “청와대가 이렇게 가기 힘든 곳인가 싶다”고 말했다.
경찰들은 인도 위까지 올라와 시민들을 연행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쪽으로 길을 내주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 가랑비는 폭우로 변했다.
11시 10분 경, 경찰은 몰아놓은 시민들 측면으로 여경 10명을 투입해 대회를 주도하던 용혜인 씨를 표적연행했다. 당시 함께 있었던 고려대 박 모 학생은 “경찰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쳐 나와 용혜인 씨를 함께 벽으로 몰아 둘러쌌지만, 나는 두고 용혜인 씨만 연행해갔다”고 설명했다.
용혜인 씨를 비롯해 20여 명이 연행되었지만 남아있는 시민들은 폭우를 맞으며 “청와대로 가겠다”고 끊임없이 구호를 외쳤다. 이날 청와대로 가겠다는 시민들의 의지는 강했다. 경찰에서 귀가를 원하는 시민들에게 길을 터주었지만 밖으로 나간 이들은 많지 않았다.
11시 30분 경, 2차 충돌이 발생했다. 인도 경계를 막아서고 있던 경찰 일부가 순식간에 뒤로 빠지면서 시민들이 앞으로 쏠려 나갔고, 경찰은 그 순간 토끼몰이로 시민들을 연행했다. 시민들도 순간 길을 건너 도로를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방송차에 올라가 피켓을 펼치고 구호를 외친 남성 3명을 연행했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한 남성이 동공이 풀리고 실신증상을 보였지만 응급조치 없이 질질 끌다시피 해 연행을 강행했다.
11시 50분 경엔, 카톨릭대 최 모 학생이 뇌진탕 증세를 호소하며 실신했다. 주변 지인들은 “최 모 씨가 방송차 근처에서 경찰과 실랑이 도중 화단에 머리를 부딪힌 후, 어지러움증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10분 후 구급차가 도착해 최 모 씨를 근처 강북삼성병원으로 이송했다. 최 모 씨는 구급차에 실릴 때까지 전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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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단에 부딪혀 쓰러진 최 모 학생 뇌진탕 증세 호소 | | |
자정이 넘어갔지만 시위대는 지칠줄 몰랐다. 확성기는 없었지만 서로 구호와 발언을 주고 받으며 끝까지 남았다. 반대쪽 인도에서 경찰에 고착돼 있던 한 여성이 “27년 전 오늘, 1987년 6월 10일에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섰기에 우리가 조금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 말했다. 자신을 전도사라고 밝힌 한 남성은 도로 쪽에 서서 “신이 자기 모습대로 인간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회를 보라, 이 사회는 이윤이 그 인간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있다”며 “한 학생이 쓰러져 실려 나갔는데도 경찰은 무미건조하게 돌아가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곳에 오고, 한발씩 더 나아가 이 체제와 당신들의 권력을 무너뜨릴 것이다”고 소리쳤다.
지난 5월 15일, 청와대의 무조건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삭발과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한신대 민중신학회 소속 김 모 학생은 “오늘 우리는 경찰이 퇴로를 열어주었지만, 당당히 앞으로 걸었다”며 “비록 저기 청와대까지 가지 못 했지만, 여전히 저 곳에 가지 않고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려대 박 모 학생 역시 “세월호 추모를 위해 거리를 몇 시간 걷다가 ‘오늘도 추모했구나, 잊지 말자’고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청와대로 가야한다”며 “더딜지언정 우리의 발길은 경찰이 열어주는 청와대 반대 방향이 아니라 청와대로 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1일 0시 30분, 경찰은 발언을 했던 학생들을 시작으로 무차별 검거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목이 졸리고, 상의가 찢기며 폭력적으로 연행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이윤보다 생명이다”, “세월호를 잊지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절규했다.
경찰은 두 대의 대형 경찰버스가 연행자로 가득 차자 미니버스를 대절해 연행자를 태웠다. 이 과정에서 버스에 연행된 이 모 여성이 김종보 민변 소속 변호사에게 접견권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묵살했다. 미니 버스를 담당하던 지휘관은 김 변호사에게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며 버스의 문도 닫지 않은 채 황급히 연행 현장을 빠져나갔다.
0시 55분 경, 한 여학생과 중년 남성이 연행을 마치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경찰 대형 버스를 막기 위해 차 밑에 들어가 누웠다. 이 중년 남성은 “왜 죄 없는 학생들을 잡아가느냐”며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으나 도로에 누운 즉시 연행되었다. 이어 8명의 시민도 버스를 막고 도로에 연좌농성에 돌입했지만 이내 한 명씩 전원 연행되었다. 인도에 서 있던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새벽 1시 5분 경, 연행자가 탑승한 경찰 버스 세 대는 40여m 경찰들의 호위 속에 모두 삼청동 '만인대회' 현장을 빠져 나갔다. ‘만인대회’ 주최 측에 따르면 경찰은 이날 73명을 연행해 도봉, 중랑, 중부, 강남, 금천 등 6개 경찰서로 이송했다. (기사제휴=참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