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려 말하면 <슈퍼의 여자>는 일종의 갱생기다. 남자주인공 고로는 망하기 직전인 슈퍼마켓 ‘정직한 고로'의 지배인이다. 어느 날 마을에 싼 가격을 무기로 공세를 펼치는 ‘파격 할인점'이 들어서서 정직한 고로는 위기에 처하지만, 고로가 우연히 유능한 초등학교 여자 동창 하나코를 만나며 그의 도움으로 슈퍼마켓을 부흥시켜 낸다.
이 글에서 나는 영화 <슈퍼의 여자>와 근대화의 기획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려 한다. 물론 1996년에 개봉한 영화라 단순히 병치하는 건 무리다. 1990년대는 세계화가 가속화되며 네이션으로서 국가의 해체가 예상되었던 시기이자 한편 스테이트로서의 국가는 더욱 강화된다는 점에서 국가가 변이를 겪는 시기다. 도요타, 소니와 같은 굵직한 기업으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는 세계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였지만 버블 이후 세계적인 규모의 장기적인 경제침체에 접어들게 된다.
말하자면 근대화의 기획이 역사적으로 실패했음이 드러난, 혹은 적어도 절반의 성공에 그쳤음이 드러난 시기다. 이미 1970년대를 거치며 부는 소수에게 독점되었고, 하층 남성 노동자의 분노는 여성에게 쏟아졌다. 혹자는 이것이 1970~80년대 동아시아 지역 영화들, 구체적으로 한국의 호스티스물과 일본의 로망포르노에서처럼 여성이 가학적으로 재현되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그렇다면 <슈퍼의 여자>는 새삼스럽게 미완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되풀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영화인가? 대답부터 하자면 그렇지는 않다.
근대화의 열쇳말은 생산성이다. 경쟁자가 우글거리는 시장에서,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더욱 싼 가격에 질 좋은 제품을 제공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슈퍼의 여자>에서도 ‘정직한 고로'의 기획은 ‘파격 할인점’과의 경쟁 즉 외부에서 촉발되었다.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어떻게 ‘정직한 고로'는 도전을 물리치고 최고의 가게가 될 것인가?
고로와 하나코는 홍보차 자전거를 타며 동네를 돌다가 마을이 훤히 보이는 높은 언덕에 도착한다. 여기는 영화의 서사 무대를 벗어난 공간이다. 하나코는 고로가 내건 ‘최고의 가게'를 세우겠단 이상을 되묻는다. 일본 최고의 슈퍼마트라니, 규모에서? 매출에서? 모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고객들 입장에서, 가장 고객 친화적인 슈퍼로 만들자고 하나코는 고로에게 말한다. 어떻게 최고의 마트를 만들어내는지 하나코의 기획과 근대화 과정을 하나둘 비교해보자.
프로의 배치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숙련노동이 비숙련노동으로 대체되어 더 많은 노동자가 공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이행은 장인의 저항에 인해 순순히 이루어지지만은 않았고 때로 폭력을 동반한 강력한 체제가 요구됐다.
<슈퍼의 여자>는 한참은 뒤늦은 듯한 이행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무대 ‘정직한 고로'에서 ‘프로'(장인) 대 하나코 즉 숙련노동자 대 경영자의 전선으로 나타난다. 슈퍼마켓의 각 코너에서 육류, 어류, 야채판매 등 각각의 프로들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자기들끼리의 규율이 있다. 그래서 슈퍼마켓을 재편하려는 하나코의 기획에 비협조적이다.
하나코는 어류 장인에게 조립라인을 돌리겠다며 생선 손질하는 법을 다른 직원에게도 가르쳐달라고 한다. 전문 노동의 공정을 분업시켜 비숙련노동자에게 할당하는 테일러이즘의 전략이다. 하지만 장인은 “나도 어깨너머로 배웠고 다들 그렇게 배워.”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하나코는 이들 숙련노동자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무마시켜낸다. 고객이라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양질의 제품을 고객에게 내놓자는 하나코의 편에 하나둘 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비숙련노동자를 등에 업은 하나코는 프로들에게 여전히 깍듯하다. 그들을 몰아내지도 쫓아내지도 않는다. 어류장인도 신년이 지나면 자기 가게를 차려 독립하겠다고 한다. 말하자면 ‘프로'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의 병존을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의 배치
한편 <슈퍼의 여자>는 소비자 대 생산자라는 축도 뒤흔든다. 근대 자본주의는 대량생산과 더불어 소비, 주로 향락과 결부된 소비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리고 대중매체에는 소비자로서의 주체가 타락의 길을 걷고 처벌되는 서사가 있는데, 한국고전영화를 예로 들자면 <자유부인>과 <미몽>이 그 대표작이랄 수 있다.
<슈퍼의 여자>가 그리는 소비자 상은 위 영화들과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그들은 진열대에 매혹된 채 파멸을 향해 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코가 부지배인이 되지마자 제일 먼저 한 건 주부평가단을 조직한 일이다. 그들의 평가를 기반으로 삼각김밥의 식재료를 점검하고 슈퍼마켓을 다시 건설해간다.
직장 내 또 하나의 전선은 재포장을 이슈로 그어진다. 한쪽에는 생산자와 회사 그리하여 이윤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소비자, 가정, 고객만족이 있다. 하나코는 여성 사원을 두고 이분들도 집에 가면 가족이 있는 주부들이라며 다들 집에 가면 저녁을 짓지만 ‘정직한 고로'에서는 장을 보지 않는데 아직 우리 마트가 자기 직원의 신뢰도 못 받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여성 사원들은 이때 소비자의 대표로서 가정의 대표로서 재포장을 반대하며 남성 사원들에 맞선다. 결국, 재포장금지안이 통과되는 걸로 일단락된다.
젠더의 배치
이 모든 변화의 시발점을 마련한 하나코, 이 여자 정말 대단하다. 가히 최고의 여자라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코의 기획 이전에 하나코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의 기획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근대화는 젠더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두드러진 전략은 여성을 타자로 내세우며 남성이 합리화의 자리를 점하는 식이다. 이런 유형의 기획과 젠더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로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쌀>을 들 수 있다. 주인공 상이군인 용이는 시골의 가난한 한 마을을 조직해 부의 기틀을 마련할 관개수로를 뚫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여성은 무당 등의 형상으로 전근대를 대표한다.
정반대의 전략도 있다. 국가 건설nation-building의 시기 1930년대 대만에서 만들어진 <신여성>이 그렇다. 아시아가 서구 열강에 참패한 시대에 누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주체가 될 것인가? 무능한 구세력 즉 상류계급 남성에 일임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여성이 불려온다. 근대화의 기획project은 이제 여성에게 구원자의 역할을 투사project한다. 여기서 여성은 근대화를 수행할 이상적인 인류의 다른 이름이다.
개략적으로 <슈퍼의 여자>는 <쌀>보다 <신여성>과 비슷한 젠더배치를 보여준다. 문제가 있는 구사회가 있고 여기에 맞서는 여성주체가 있으며 그 기획이 주변을 추동해 새 사회를 건설해내는 구조다. 이타미 쥬조 감독의 다른 영화 <민보의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야쿠자 협박사건(민보) 전문 여자 변호사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야쿠자와 맞선다. 어느날 주인공은 불한당의 습격을 당하게 되고 벌벌 떨던 다른 남자 호텔 사원들에게도 용기가 전파되어 결국 감화된 남자 사원들 스스로 민보를 해결한다. 탈세범을 끝까지 쫓아 잡아내는 <마루사의 여자>나 살인 사건 목격자인 주인공 여배우가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해내는 <마루타이의 여자>에서 모두 여자 주인공은 하나같이 사회의 병폐에 대항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며 그를 통해 주변 소시민들에게 소소한 용기가 퍼진다.
<슈퍼의 여자>의 경우 결말부에 적지 않은 분량으로 차량 추격 장면이 할애됐다. 질주하는 씬들 사이로 그간 뒤처져있던 고로의 남성성이 치고 나오며 결국 하나코를 구출해낸다. 하지만 여기에 단순히 남성이 복권한다는 혐의를 씌우는 건 곤란한데, 여성이 단지 무력한 위치로 되돌려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자리
한편 결말부는 서사 내내 부재하던 국가가 경찰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른 수많은 액션영화 역시 경찰의 사이렌이 퇴장신호처럼 울리며 종지부를 찍는다. 여기서 재차 확인되는 건 국가의 재림이라기보다 국가state의 편재성이다.
암전된 스크린을 바라보며 영화의 자리를 다시금 고민해본다. 영화는 기획의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문자 그대로의 매체이자 근대화를 가속하는 촉매 역할을 해왔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들은 (종종 불온하지만 늘 저항적이진 않은 방식으로) 상상을 해왔으며, 여기서 영화는 상상을 현현해내는 영매가 된다.
<슈퍼의 여자>의 배경이 되는 ‘정직한 고로'는 보편적인 슈퍼마켓이자 보편적인 조직의 대표로서 재현된다. 자막을 통해 다시금 여기서만 일어나는 혹은 슈퍼마켓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동네 슈퍼마켓의 이야기라는 게 강조된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그렇다. 영화 내내 배경이 되는 밀양이 동아시아 소도시의 토속적인 장소가 아니라 어떤 한 마을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듯 말이다. 영문법으로 치자면 정관사(the)가 아니라 부정관사(a)가 적절할 것이다.
<슈퍼의 여자>는 이렇게 근대가 품었던 가능성을 영화라는 인큐베이터로부터 확장시켜낸다. (한편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는 유령에 홀린 듯 근대성의 기원과 여기서 생성된 폐허를 탐험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이타미 쥬죠를 따르자면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 것이다. 하지만 분명 꽤 신나는 여행일 거다. 하나코와 고로가 어릴 적 췄던 너구리와 공주 춤처럼, “움치치치 움치치치 움치치치 움~파!”
사실 미래와 현재의 거리감에 따른 이런 두근거림이야말로 근대화 기획의 핵심 추동력이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