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백목사의 예수읽기 50번째는 5월 20일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 출판 기념 북콘서트에서 진행된 백창욱 목사의 강연 원고를 정리한 글이다.
세월호 집회에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문구가 있다.
"가만히 있으라" 이 여섯 글자 속에는 세월호의 문제, 권력의 문제가 모두 담겨 있다. 권력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다. 다른 소리를 내면 재갈을 물리고 탄압한다. 그리고 권력의 소리만 수용하라고 협박, 공갈, 선전한다. 거기에다가 자본의 소리까지 덧붙었다. 독점자본에 포섭된 매체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을 소비하라고 강요한다. 이처럼 권력과 자본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들 말만 들으라고 나팔 분다. 따라서 특별히 의식하고 각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저절로, 알게 모르게, 그 소리에 세뇌돼 버린다. 세뇌된 뇌는 우리 생활을 지배한다. 가장 심각한 사회구조 원인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아무 탈 없이 살아간다. 그리고 한 가지 소리에 길들어져서 다른 소리, 다른 행동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스란히 권력에 악용돼서, 다시 대중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되돌아온다. 무슨 짓을 해도 용납하도록 지배질서를 구축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이 한 가지 소리의 기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이 소리가 그토록 위선적이고, 위험하고 저주의 소리인 줄은 미처 몰랐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공식방송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구조는커녕, 수백 명 목숨을 앗아갔다. 역설적이게도 그 소리를 거부하고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은 살았다. 이처럼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느냐, 또 그 소리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우리 인생에서 사느냐 죽느냐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일이다.
오늘 강연은 주제는 '다른 소리'에 대해서이다.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부제가 '백창욱 목사의 복음 이야기'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야말로 '결정적인 다른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뜻하는 헬라낱말은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을 뜻한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 저자는 복음이라는 말을 예수와 연관을 지어서 복음서라는 매우 독특한 장르를 만들었다. 복음서라는 장르는 그전에는 없었던, 매우 새로운 문학양식이다. 마가는 복음서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기가 막힌 서사로 풀었다. 예수께서 하신 공적인 활동, 말씀과 행위를 복음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마가 1:1) 이 말씀처럼, 마가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동일시하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복음은, 이 말을 처음 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위험천만한 소리였다. 왜냐하면, 복음은 아무나 쓰는 말이 아니고, 바로 황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황제가 탄생하거나 즉위하거나 전쟁에서 이긴 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소식이 복음이었다.
옥타비우스 카이사르는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내고 로마 제국 안에 처음으로 지속적인 평화의 질서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것을 '팍스로마나'라고 한다. 옥타비우스는 자신을 '신 같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때까지 신들에게만 붙였던 아우구스투스(높아지신 이)라는 칭호를 자기에게 붙였다. 그리고 평화를 이룬 위대한 인물, 세상의 구주이며 구원자라고 선언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복음, 구원, 구주(주님), 구원자 모두 황제의 고유언어였다. 이것은 공식소리였다. 로마제국의 신민들은 황제가 전해주는 소식-민중을 위하는 소식이 아니라, 제국을 영속시키는-에 기뻐하며,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의 보호를 구원으로 여기며, 평화를 누렸다. 따라서 이런 지배질서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은데서, 소수 중 소수이며 비주류 중 비주류인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이 모든 황제의 언어를 전복했다. 제국지배개념의 언어를 예수께 돌렸다.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에서도 밝혔듯이, 마가복음은 처처에 황제와 제국을 풍자하고 예수와 하나님나라의 평화가 얼마나 좋은지를 암시하는 이야기가 널려 있다. 그들이 볼 때, 황제와 그 지배질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것은 그들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국을 떠나서 살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은 우선 그들의 고백에서부터 신앙을 실천했다. "우리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는 철저하게 예수도를 실천했다. 예수정신으로 살았다. 초기 신자들은 그렇게 살아도 하나도 아쉬울 게 없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층계급인 히브리였던 것처럼, 그들 역시 그 땅에서 철저히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민중끼리 서로 위하며 의지하고 그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를 빙자하여 성공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제국의 지배계급이 자기들을 끼워주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들도 제국체제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제국 영토에서 물리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들 공동체 안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나라를 실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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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모습은 예수를 따르는 민중에게서 나타난다. 오클로스, 땅의 백성들은 처음에는 오직 한 가지 소리, 자기들을 짓눌렀던 율법의 이데올로기만 듣고 살았다. 자신들을 지칭하는 율법의 족쇄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에도 찍소리 못하고 눌려서 희망없이 살았다.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오직 로마에 빌붙어서 민중을 벗겨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원래 율법의 뜻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인데, 이것을 모두 착취와 속박의 언어로 탈바꿈시켜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신음하던 민중들이 다른 소리를 들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접한 것이다. 민중들은 '동터오는 하나님나라'를 맞이하였다. 그 소리를 수용하고 따라 움직이자, 민중들은 살아났다.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다른 소리에 감동되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다시는 옛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 세상을 만끽했다. 전에는 지배세력의 소리에 전전긍긍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언어를 새로 만들어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와 해방을 누렸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소리가 이들은 바꿔 주었다.
하지만 지배세력의 나팔소리와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소리를 내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다. 지배체제를 벗어나겠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기독언어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것이 처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초기모습이었다. 그 뒤 기독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잘 아실 거다.
예수시대는 팍스로마나가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였다면, 지금은 권력과 자본이 뿜어대는 맘몬과 탐욕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모두가 이 두 악마군대에 매여서 쩔쩔맨다. 교회, 세상 예외없다. 작금 기독교는 개신교, 가톨릭 구분없이 권력과 밀월관계이다. 권력은 수세에 몰릴 때마다, 소위 종교를 이용해서 물타기를 하고, 국면전환을 한다. 그런 작전이 가능한 이유는 주류매체가 열심히 나팔을 불어주어서이다. 게다가 허다한 사람들이 권력놀음에 의심을 품기는커녕, 무비판적으로 따른다. 평생 한 가지 소리에만 익숙해진 까닭이다.
바로 이런 와중에 우리가 서 있다. 만만치 않은 세상 한복판이다. 그 속에서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일 우선해야 할 일은 권력이 퍼뜨리는 언어 대신에 우리만의 고유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언어는 의식의 결정체이므로 '어떤 소리를 내느냐'는 살고 죽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고유언어의 보고이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들이 제국이 지배하는 정치권력하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생존기라고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서문 첫 문장에서 말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다. 나는 내 의식과 행동의 출처를 성경에서 찾는다. 야웨를 신봉한 예언자들과 민중을 사랑하여 지배세력과 맞장 뜬 예수말씀에서 지혜를 얻고 확신을 가진다.
다음은 우리의 언어가 살아 숨 쉬도록 지켜야 한다. 우리 소리가 살아 있어야 우리도 그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소리를 지키는 투쟁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히브리노예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평등사회를 건설하기까지는 무수한 투쟁을 거쳐야 했다. 고유소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근본주의신앙에서 신앙전향을 한 1984년 이후 지금까지, 한집안의 생활인으로서 산 시절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월은 오직 이 문제에만 집중했다. 근본주의가 점령한 한국교회에서 독립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신앙과 소리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가 <유배지에서 예수 읽기>이다.
아무리 말하고 싶더라도, 들어 줄 사람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 무한감사하다. 여러분과 함께 동지로 설 수 있어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