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사고가 난 다음 날, 박근혜씨는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가서 유가족들을 만난 후, 한 어린이를 위로하는 사진이 많은 구설수에 올랐다. 이 아이는 제주로 귀농하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구조된 아이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아이를,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이 절대 필요한 아이를, 박근혜씨의 연출사진을 위해 병원에서 진도체육관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이리저리 시달려야 했다.
5월 2일(금) 한겨레신문은 1면에 "아이들 죽음 내모는 나라"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최근 5년간 어린이청소년(0-19살) 17,940명이 사고사로 죽었다. 사망이유는 익사, 타살, 추락, 화재, 교통사고, 자살이다. 칠곡계모살인, 경주리조트붕괴, 해병대캠프사고는 그중 일부다. 2012년 한 해만 어린이청소년 1,027명이 사고로 죽었다. 해마다 세월호 4척의 침몰을 겪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와 인구, 경제규모가 비슷한 스페인과 비교하니, 아동청소년 사고사가 갑절도 더 됐다.
선진국들의 아동보호사례를 보면, 작지만 섬세한 제도의 차이가 나타난다. 스웨덴은 신생아의 속옷 젖병 따위 필수유아용품을 담아 산모에게 지급한다. 이를 베이비박스라고 부른다. '국가가 아이를 돌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베이비박스는 신생아를 버리는 상자이다. 같은 단어인데 이렇게 뜻이 정반대일 수가!
교육열이나 학업성취 결과만 강조하고 정작 아이들 권리의 기초인 생존권과 보호권은 너무 허술하게 취급했던 우리 사회 인식수준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어린아이를 매우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른 욕심에 아이들이 대상화, 수단화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이들이 수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런 현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보자.
오늘 성경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세 복음서를 나란히 비교하면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 있다. 바로 예수의 감정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셨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감정표현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화를 냈다는 말씀은 이례적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는 화를 냈을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려와서는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고, 그 장면을 예수가 봤다. 늘 신중하고 온유한 사람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화를 냈다. 그리고 말씀한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제자들은 무엇을 잘못했나? 느닷없는 질책에 제자들도 당황했을 것이다. 자기들은 바쁜 주님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이 예수를 성가시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뿐인데...과연 그런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데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훨씬 더 많이 작용한다. 잠재된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그 사람이 발붙이고 사는 사회의 문화, 관습, 제도와 법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은연중 개인에게 스며들어서 형성된다. 그것이 개인의 DNA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본주의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오랜 세월 자본주의가 이 땅의 고정생활양식이 되었고, 우리 개개인이 거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지배한 무의식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고대사회 풍습이다. 어린이의 존재는 매우 무가치했다. 어린이들이 집에서는 사랑을 받지만, 사회적으로는 홀대받았다. 고대사회의 높은 유아사망율을 보면 더욱 확연하다. 많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특히 가난한 나라에서는 태어난 아기 중 절반 정도가 열두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아이부양이 힘들어서 버려지는 아이도 허다했다. 이처럼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통념으로 자리잡았다. 제자들도 이 시대통념에서 예외는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리새적 율법에 기반한 종교적 업적주의이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길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공로를 세우는 거다. 제자들이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도 자기들 힘으로 이루는 나라라는 무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런 무의식에 근거한 의식과 행동에서는 모든 면을 업적에 기반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기들의 무의식에서 거부하는 무엇이 발생하면, 그것은 본능적으로 그 요소를 배척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그게 바로 어린이의 등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어린이, 약자,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율법규정을 지켜서 공로를 내세울 만한 처지에 있지 않다. 더군다나 지금 제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데 정신이 꽂혀 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유력한 정치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정치권력과 무관한, 오히려 훼방거리가 되는 어린이들의 등장은 하나도 반가울 리가 없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부도 정치인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지금 풍토처럼, 제자들도 자기들이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단지 걸리적거리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까지 꾸짖은 것이다.
예수는 계속 말씀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어린이를 하나님나라 귀빈으로 추켜세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유념할 게 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높이 세우는 까닭이 이들이 무죄하거나, 윤리적인 표본이어서가 아니다. 어린이들도 죄를 짓는다. 또 윤리적으로도 하자가 많다. 부모는 물론이고, 아이들을 상대하는 생업을 가진 어른들은 잘 알 것이다. 예수께서 아이들의 이런 허물을 몰라서 하나님나라 주인공으로 모신 게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만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이것은 약점일 수 있지만, 이 약점이 하나님나라와 완전히 일치한다.
결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벌어먹지를 못한다. 오직 받아먹기만 한다. 어른이 될 때까지는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다. 아이들은 받아먹기만 하므로, 좋다싫다 검증하거나 선별할 수가 없다.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예수는 바로 어린이처럼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완전히 무력하여서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는 전적으로 은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나라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자기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세상, 보잘것없는 사람이 우선으로 갈 수 있는 세상, 의심없이 빈손을 벌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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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향소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유가족. [출처=jtbc 뉴스 갈무리] | |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가? 자본과 권력이 우리 삶을 지배해 버린 지 오래됐다. 세월호 참사는 그 모든 균열증상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린 심판이다. 세월호 참사의 일차문제는 배금주의다. 사람생명보다 돈을 귀중히 여기는 풍토가 배의 안전규정을 무시하고, 로비, 뇌물, 유착관계로 얽혀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이차문제는 침몰 이후 보여준 권력의 악마성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에 갇힌 생명, 희생자를 잃은 유가족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의 책임을 모면할 수 있을까에만 온통 집중했다.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것도 통탄스럽고, 그에 대한 변명이랍시고, 거짓말, 조작, 연출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온갖 저질스런 행동을 저질렀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는 자본과 권력이 얼마만큼이나 사악할 수 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또 거기에 물든 사람들의 비루한 악마성까지 동시에 보여줬다.
그러므로 어린이같이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가장 약한 존재를 중심에 놓고 사람살이를 하라는 촉구이다. 어떤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린이를 잣대로 놓으라는 맹성이다.
여전히 자본과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악마적 삶을 단절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하게도 하나님나라에서 멀다. 그러나 어린이를 대상화하지 않고, 귀중히 보는 식별력이 있다면, 자본과 권력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세상을 살 것이다. 진정으로 권한다. 악마적 세상과 단절하고 하나님나라를 받들라. 거기에 우리 살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