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우리는 너무도 참담한 소식을 접했다. 기독교 고난주간에 일어난 비보 덕에 저절로 침묵하고 가슴 아픈 한 주간을 보냈다. 4월 20일 주일은 예수의 부활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이지만, 세월호 침몰에 유명을 달리한 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울 뿐이다.
정부가 보여준 위기관리대처능력은 모든 사람의 분노를 자아냈다. 아직 사고원인조차 속 시원히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정부가 구조과정에서 보여준 무능함, 안이함, 뭔가를 숨기려는 태도를 볼 때, 과연 진상을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천안함 사고같이 사건을 엉뚱하게 몰고 가지는 않을까?’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더욱 실망스런 일은, 당국이 전혀 실효성 있는 구조활동을 하지 못한 거다. 사고 이후 생존자 한 명 구하지 못한 것은 무능의 극치이다. 구하지 않은 건지, 못한 건지... 무엇보다도 선장과 승무원들이 보여준 행실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어떻게 제일 먼저 빠져나올 수 있는지, 과연 저 사람들이 어른이 맞는지, 이 사람들에게 직업윤리가 있는지, 무책임한 사람들을 보자니 한탄스럽다.
그런데 여기에도 노동문제가 있다. 세월호 직원 70%가 비정규직이다.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책임있게 일을 수행할 제도적 조건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모순이 평소에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가 비상한 일이 터졌을 때, 한꺼번에 다 쏟아진다는 생각이다.
오늘 글 제목을 '끝까지 남은 사람'으로 정했다. 이 제목이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나? 배의 최고책임자인 선장의 가장 큰 잘못이 비상상황에서 끝까지 남지 않은 것임을 볼 때, 오늘 글은 예수부활과 끝까지 남은 사람 사이에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암시이다.
<예수읽기 47> "나사로야, 나오너라"에서,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 소식보다는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답으로 새로운 복음서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공동체 필요에 대한 응답이라는 전제는 오늘 부활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부활이야기 첫 장면에 새로운 것은 없다. 네 복음서를 나란히 대조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네 복음서가 모두 비슷하다. 모두 지금의 일요일,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다는 요지이다. 그런데 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의 특징이 있다. 세 복음서는 무덤을 찾아가는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등장인물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 실명이 나오는 사람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 시몬 베드로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부활이야기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베드로와 마리아를 조명하겠다는 뜻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1-10절, 11-18절 두 문단이다. 앞부분은 베드로의 부활경험이고, 뒷부분은 마리아의 부활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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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덤으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 뷔르낭(1850~1921)/유화, 1989, 오르세 미술관, 파리 | | |
우선 베드로의 부활경험을 보자. 예수시신이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전갈을 받은 시몬은 무덤으로 달려간다. 시몬이 무덤 안에서 본 것은 삼베와 수건이다.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는 현장묘사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적대자들의 주장을 의식한 말이다. 시체도난이나 이장이 아니라는 표시이다. 도난이나 이장이라면, 삼베와 수건을 따로 고이 모셔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시몬이 본 건 삼베와 수건, 이를 통해 확인한 것은 빈무덤이라는 것, 이게 전부이다. 시몬이 부활에 대해 본 것은 실체보다는 실체를 알려주는 포장정도를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몬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예수의 부활을 아직 깨닫지 못한 중에, 시신이 없어졌다는데, 돌아가도 되나 싶은데, 하여간 그냥 심드렁히 돌아간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보듯이, 그런 사람, 그런 일 비일비재하다. 마땅히 관심을 기울이고 힘을 쏟아야 하지만, 나와 무관하다는 듯, 외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세월호에 아직 사람이 살아 있다는 정보가 나오지만, 정부는 심드렁하게 지나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그저 부모만 애간장이 녹는다.
다음은 마리아의 부활경험이다. 무엇보다 마리아의 마음바탕을 보자. 마리아는 이른 새벽, 사방은 여전히 어둑어둑한 시각에, 동행자 없이 용감하게 무덤으로 갔다. 예수사랑이 인간적인 연약함을 초월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리아는 끝까지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시몬은 다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따라가지 않았다.
마리아의 온 관심사는 예수시신이 어디로 갔느냐에 있다. 그것 때문에 마리아는 만나는 사람마다 집요하게 물어본다. 처음에 무덤어귀를 막은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말할 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하더니, 천사들과 이야기할 때도 똑같이 말한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 예수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할 때도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15절)라고 한다.
마리아는 예수가 부활한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시신이 없어졌다고 성급하게 추측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를 비웃거나 경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마리아의 집요한 의지가 부활예수를 만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마음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치는 행동이 참으로 가상하다. 행동으로 뒷받침하지 않는 말은 아무 소용없다는 점에서 마리아의 움직임은 소중하다. 마리아의 당황과 슬픔은 예수를 알아보고서야 멈춘다.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남은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겪은 일은 시몬이 겪은 일과 질적으로 다르다. 마리아는 천사를 본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12절) 이 상황묘사는 마리아가 천사들을 구체적으로 봤다는 뜻이다. 시몬은 죽은 사람을 싸맸던 삼베와 수건을 봤을 뿐인데, 마리아는 천상의 존재를 본 거다. 그리고 이야기까지 나눈다. 그리고 천사로부터 연대자의 위로를 받는다. "여자여, 왜 우느냐?" 고통의 현장에서 제일 반가운 사람은 연대자이다. 연대자가 자기의 심정을 알아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만큼 위로가 되고 든든한 일은 없다.
마리아는 천사와의 대면에 이어서 기어이 부활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천사에게 들었던 연대의 말을 똑같이 듣는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우리가 천사나 예수를 우러르는 이유는 바로 이거다.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 소위 대명천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시절에, 권력이 벌이는 행태와 정확히 반대편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마리아가 알아보지 못했던 예수를 알아보는 결정적 전환은 따뜻한 부름이다. 예수는 "마리아야!" 하고 불렀다. 평소에 부르던 대로,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감으로. 이를 알아들은 마리아는 "라부니!"하며 응답했다.(히브리말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친밀감, 연대가 결실을 보려면, 인격적으로 교감이 있고 난 후에 가능하다. 이런 관계의 성실함 없이 무엇을 하는 것은 매우 기능적이고 일회적 일로 그친다. 그만큼 피상적이 된다. 애정과 따뜻함이 담긴 부름에 마리아는 당황과 불안감에서 벗어나서 평온을 찾았다. 그리고 예수와 정상적으로 교제하고, 그 결과 예수로부터 증인의 위탁을 받는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께 위탁받은 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18절)
요한복음 저자는 시몬으로 대표되는 주류교회의 관성과 건성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예수공동체는 부활예수와 살아있는 교감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또 이를 증거하는 사도직(증인) 임무에 남성의 독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대사회 여성이 증인이 되는 위험부담을 알면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웠다. "봐라, 시몬은 고작 삼베와 수건을 보지 않았느냐,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를 봤고, 부활예수와 대면했다. 시몬의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여성도 교회의 사도직을 맡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했다.
나는 이 모든 특별한 부활경험의 단초가 마리아가 무덤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았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다. 우리가 진정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입으로만 노가리까거나, 하다가 말거나, 건성으로 해서는 부질없다. 진짜로 하자. 그리고 끝까지 하자. 복된 앞날을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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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뚝 떨어짐으로 하늘도 연대한다는 구체적 표시인 삼평리 망루 | | |